터키 여행제1부
2011.11.16~11.24
터키 일주 여행을 다녀 왔다.
터키는 고대 동로마제국,오스만 제국을 거쳐 오면서
지중해,에게해, 흑해 연안의 거대하고 광대한 제국의 후손으로서
자부심이 대단하였으며 2010년도에는 그리스 사태등으로
유럽의 경기 침채로 어려움을 겪을때 터키는 7.8%의 경제 성장을 하는등,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후예로서의 대단한 자존심과 다시 일어서서 과거의 영화를 찾아
대국이 되어 잘 살아 보려는 희망에 젖어 밝고 활기찬 모습을 보았다.
특히 코레아 라고 하니 심지어 연세 많은 할머니까지 상당한 호의와 따뜻함으로 반겨 주는
형제의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터키
면적;남한의 7.5배, 인구;약7500만명, 종족;돌궐족의 후예(아시아 유목민의 후예),
종교;이슬람이98%, 10만개의 이슬람 사원,수도 ;앙카라
참고;소아시아
면적 약 78만 5760 km2. 동서길이 약 1,000 km, 남북길이 400∼600 km. 아나톨리아(Anatolia)라고도 한다.
터키어로는 아나돌루라고 하는데, 어원은 그리스어 ‘아나톨레(anatole)’이며 ‘태양이 떠오르는 곳’ 또는 ‘동방의 땅’을 의미한다.
터키 영토의 97 %를 차지하며,
동쪽 및 남쪽으로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과 접한다.
북쪽 흑해 연안에는 폰투스산맥, 남쪽 지중해 연안에는 토루스산맥이 동서로 뻗으며,
그 사이에 평균 해발고도 800 m인 아나톨리아고원이 내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동부에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등 두 강의 수원과 아라라트산(5,185 m)이 있다.
중앙부의 고원지대는 스텝 또는 사막성 기후이며, 여름이 짧고 겨울은 몹시 춥다. 흑해 연안지방은 기온 변화가 적으며, 연간 비가 잦다.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은 지중해성 기후이며, 생활하기에 가장 알맞다.
이 지방은 동방과 서방을 연결하는 민족이동의 통로이자 식민활동의 무대였으며 예로부터 갖가지 문명이 꽃피었다.
BC 1680년대에는 이 반도의 고원지대를 중심으로 히타이트 왕국이 일어났으나, BC 1200년대에 쇠퇴하자
그 대신 프리지아 왕국이 일어났으며 BC 700년대에는 리디아 ·카리아 등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BC 546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제국이 침입한 후로는, 연안의 그리스 식민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반도 전체가 그 지배에 들어갔다.
그후 BC 334년 알렉산더가 침입하자 헬레니즘 세계에 편입되었으며,
그가 죽은 뒤에는 후계자인 셀레우코스 왕국에 소속되었다가, 폰투스 ·페르가몬 등의 작은 독립국이 각지에 자립하였다.
BC 133년 로마의 동방주(東方州)가 되었고, 이어 동(東)로마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어 고전(古典) 그리스도교 지역을 구성하였다.
한때 사산 왕조 이란이 침입하였으며, 이슬람 세력이 커짐에 따라 큰 압력을 받았다.
그러다가 1071년 셀주크투르크 제국이 침공하자, 이것이 그리스 로마 세계로부터 터키 이슬람 세계로 바뀌는 전기가 되었다.
1300년대 말 오스만투르크가 성립하자 이 제국의 세력에 들어갔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터키를 구성하는 주요지역이 되었다.
주요산물은 밀 ·보리 ·포도 ·과일 ·잎담배 등이며, 석탄 ·크롬 ·철광석 ·구리 ·망간 등 광물자원도 풍부하다.
현재 터키의 아시아 지역을 이루고 있는 반도.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만나는 지점이라는 입지조건 때문에 문명 초기부터 양쪽 대륙에서 이주해가거나 정복 전쟁을 하러가는 수많은 민족들이 지나는 교차로였다. 아나톨리아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전쟁의 현장으로 알려져왔다. 중앙 아시아의 연장인 중부 고원지대는 가항 하천이 전연 없고 자연적인 출입로도 거의 없는 자연지역으로 경관이 단조롭고 기후가 혹독하다. 기름진 계곡이 있고 기후가 좋은 서부 해안지역은 실제로는 유럽의 일부로 분류되기도 한다. 영구적으로 정착을 하기에 불리한 환경이 아나톨리아의 역사를 유목 부족들과 식민주의자들의 여정(旅程)의 역사이자 군소 국가들의 흥망성쇠의 역사로 만들었다. BC 1950년경 히타이트족의 초대 왕조가 수도를 쿠샤라(?)에 정하고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지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2세기 뒤 이 지역에 침투한 아리안계 종족들로부터 언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는 히타이트족은 그후 BC 17세기에 갑작스럽게 하투사(지금의 보아즈쾨이)를 수도로 한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해 아나톨리아를 지배하면서 시리아의 패권을 놓고 이집트 파라오들과, 미탄니(제라블루스)의 패권을 놓고 아시리아와 힘을 겨루었다.
히타이트 제국은 결국 그리스인으로 추측되는 인도유럽인들에게 무너졌다. 헬레스폰트 해협을 통해 유럽에서 아시아로 건너온 그들은 철제 무기를 이용해서 청동제 무기만을 가지고 있던 히타이트인들을 물리쳤다. 이 인도유럽 인종은 에게 해 연안과 그 배후지에 많은 식민지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서 프리지아 왕국이 생겨났다. 이 왕국의 자취는 각종 바위무덤·요새·부락과 그리스인 사이에 전하는 전설 속에 남아 있다. BC 8세기에 아르메니아에서 온 킴메리족이 프리지아 왕국을 유린했으며, 프리지아 왕국이 쇠퇴한 뒤에는 사르디스를 중심으로 한 리디아 왕국이 일어났다. 킴메리족의 2번째 침략에 이은 키악사레스의 침략으로 이 신흥 왕국은 멸망 직전에 이르렀으나 알리아테스(BC 617경~560)의 활약으로 침략자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리디아의 마지막 왕 크로에수스(BC 560~546)는 영토를 할리스까지 넓히고 연안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들을 정복했다. 이 번영하던 그리스 식민지들은 트레비존드에서 로데스까지 사슬처럼 이어져 있었으나 상호 질시로 인해 연합할 수 없었고 사치와 타락으로 리디아에 저항할 수 없었다. BC 546년경 페르시아 대왕 키루스 2세가 사르디스를 점령한 뒤 이 식민지들은 아무 저항 없이 페르시아로 넘어갔다(→ 색인 :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통치하에서 아나톨리아는 4개의 총독 관구로 나뉘었으나, 그리스 도시들은 그리스인들이 다스렸고, 내지의 부족들은 그들 고유의 군주`-제사장 제도를 유지했다. 다리우스가 아시아의 그리스인만이 아니라 유럽의 그리스인까지 정복하려 함으로써 시작된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BC 334년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아나톨리아를 침략함으로써 끝났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여러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이 아나톨리아 반도의 각지에 저마다의 지배권을 수립했다. 로데스는 강대한 해양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아나톨리아의 지중해 연안을 지배했다. BC 283년에는 페르가뭄에 작은 독립 왕국이 세워져 150년 동안 존속했다. 비티니아는 독립 군주국이 되었고, 카파도키아와 파플라고니아는 토착 군주들이 다스리는 속주(屬州)가 되었다. 남부에서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상업 중심지로서 안티오크·아파메아·아탈리아·라오디케아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후에 아나톨리아의 그리스화와 그리스도교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BC 3세기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온 켈트족이 상가리우스와 할리스 사이에 있는 갈라티아라는 지역을 지배했다. 갈라티아의 수도는 앙키라(지금의 터키 공화국 수도 앙카라)에 있었다. BC 190년 마그네시아에서 안티오쿠스 대왕이 패배함에 따라 아나톨리아는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BC 133년에는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을 포함하는 아시아 최초의 로마의 속주가 수립되었다. 미트라다테스 대왕 시대에는 폰투스가 무서운 강국으로 부상했으나, 결국 대왕이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축출되어 BC 63년에 죽는 것으로 끝났다. 로마인들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여러 개의 주, 동맹국, 독립국에 가까운 공국들로 편성했으며, 로마의 지배하에서 아나톨리아, 즉 소아시아는 발전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3세기말 제국을 재편할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대군관구(大軍管區)들을 해체하고 속주들을 여러 행정관구로 묶었다. 그리스도교가 들어와 점점 아나톨리아 전지역으로 퍼지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에 7개의 소아시아 그리스도교 교회가 세워졌다.
395년 로마 제국이 양분될 때 아나톨리아는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동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었으며, 토착민의 언어와 옛 종교들이 일부 사라지면서 철저하게 그리스화되었다. 6세기가 끝날 무렵, 번창했던 아나톨리아는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된 평화와 지나친 중앙 집중화로 '미로같이 복잡한' 또는 '권모술수의'라는 뜻의 비잔틴이라는 용어로 표현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군주 크로스로우 2세가 616~626년 아나톨리아를 침략해서 보스포루스 해협에 진지를 세웠으나,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군대를 이끌고 쿠르디스탄까지 진격하여 비잔틴 제국의 지배권을 회복했다. 곧이어 아랍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668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그로부터 3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과 바그다드의 칼리프들이 유프라테스 강의 교두보들과 실리시아의 관문들을 장악하기 위해 간헐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곧 동양에서 더 위험한 적이 나타났다. 1067년 셀주크 투르크인들이 등장하여 실리시아와 카파도키아를 쑥밭으로 만들었으며, 1071년에는 로마누스 디오게네스 황제를 사로잡았고, 1080년에는 니케아를 점령했다. 셀주크족의 일파가 룸 제국을 세우고 이코니움을 수도로 삼았다. 12세기에는 다수의 셀주크 아타베크인들이 아나톨리아의 여러 지역을 지배했으며, 이집트의 맘루크족은 시리아와 그 동쪽지역, 그리스인들은 폰투스, 아르메니아인들은 실리시아, 다니슈멘드족(아르메니아의 한 종족)은 시바스, 바얀두르족(그리스의 한 종족)은 에르제룸을 지배했다.
몽골족이 아나톨리아 전지역을 휩쓸고, 1243년에 룸 제국의 셀주크 술탄을 굴복시켰다(→ 색인 : 원). 투르크의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잇따라 일어난 권력투쟁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마침내 패권을 쥐고 브루사에 나라를 세웠다. 1400년에는 술탄 바예지드 1세가 아나톨리아의 유프라테스 강 서쪽 지역을 거의 석권했으나, 곧이어 티무르한테 패하고 감금되었다. 티무르는 아나톨리아를 에게 해 연안까지 휩쓸었다. 티무르가 죽자 오랜 투쟁 끝에 메메드 2세(1451~81)가 카라마니아와 폰투스를 합병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이 패권을 되찾았다. 그 뒤의 아나톨리아 역사는 오스만 제국의 역사이다. 1832년 이브라힘 파샤가 지휘하는 이집트군에게 도전을 받을 때까지 투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를 지배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 그 지배가 무너졌다. 11세기에셀주크의 대군이 아나톨리아를 유린한 데 이어 투르크족의 유민들이 계속 밀려왔다. 그들은 토착민들을 학대하지는 않았으나 아나톨리아를 볼모지로 만들었다. 모든 지역에서 농경이 중단되었으며, 토착민들은 그들의 땅을 버리고 산이나 도시로 피신했다. 따라서 토착 농민들 자신이 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쳐들어온 몽골족이 도시들을 약탈하고 '무장 저항의 장소가 될 수 있는 모든 곳'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오스만 제국 초기의 술탄들이 강제로 터키어의 사용을 유도하고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시킴으로써 헬레니즘 문명의 자취는 거의 모두 사라졌다. 아나톨리아는 현대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복구되기 시작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철도건설 및 그에 따른 교역과 지방 공업의 성장 모두 큰 타격을 받았다. 1918년 10월 30일 투르크군이 휴전협정에 서명할 무렵에는 영국군이 아나톨리아의 아랍어 사용 지역을 전부 점령하고 있었다. 1919년 5월 그리스군이 스미르나와 이오니아 연안 지역의 대부분을 빼앗고 점차 에스키셰히르(옛 이름은 도릴라이움)와 아피운카라히사르까지 점령해들어갔다.
1920년 8월 투르크가 세브르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아나톨리아는 5세기 동안의 투르크 지배를 통해 확정된 지리적·종족적인 경계 안으로 축소되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의 위임 통치를 맡았고, 프랑스는 시리아를 위임 통치하게 되었다. 그 사이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는 아나톨리아의 남부와 남동부를 각국 세력범위 지역으로 나눈 3국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곧 무스타파 케말(후에는 아타튀르크)이 이끄는 투르크 민족주의 운동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해 투르크군이 실리시아에서 프랑스군을, 스미르나에서 그리스군을 몰아냈다. 세브르 조약은 승인되지 않고 로잔 조약(1923. 7)으로 대체되었는데, 로잔 조약을 통해 좁은 범위의 아나톨리아에 대한 투르크의 주권이 인정되었다. 1923년 11월 술탄국과 칼리프국이 잇따라 무너진 후 터키는 공화국을 선포하고 앙카라를 수도로 삼았다. 로잔 조약과 함께 연합국의 후원으로 터키와 그리스는 주민 교환협정을 맺었으며, 그 협정에 따라 약 100만 명의 그리스인들이 아나톨리아 서부지역에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로 이주했다.
제1부 ;수도 앙카라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투르크 영묘공원
아타 투르크 대통령
본명;무스타파 케말,파샤;장군,출생;1881년 현 그리스 지역인 데살로니카에서 탄생(당시는 오스만 제국의 영토)
오스만제국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만 제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오스만 제국의 장군이었던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었슴.
오스만 제국은 세계1차 대전시 독일편에 가담하였고,이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지중해에서 마르마라해(SEA DF MARMARA)입구에
남서 방향으로 길게 뻗은 갈리폴리 반도를 공격해 오자 케말 파샤는 이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등장함.
그러나 1차대전의 패전국이 된 오스만(현 터키)제국은 전후 문제를 다룰 세브르 조약에서 연합국으로 부터 영토 분할을 강요 당하게 된다.
이에 케말 파샤가 주동이 되어 영국,그리스 등과 독립전쟁을 치루어 상당한 전공을 세웠고,영국등은 협상을 통해 에게해의 대부분의 섬은
그리스에 내어주고 이즈미르등 소아시아 본토와 보스 포르스 해엽 서쪽의 본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확보하는등 크나큰 전공을 세운다.
그후 1차 대전이 종전 되고 1923년 새로운 현 터키 정부가 탄생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아타투르크란
명칭을 갖게 된다. 그래서 전 터키에서 아타투르크 대통령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무스타파 케말은 대통령이 되고 난 후 터키어를 반포함은 물론 많은 정치,경제,사회적 대 개혁을 통해 오늘날의 터키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스타파케말 대통령은 1938년11월10일 오전09시05분에 이스팜불 돌마 바흐체 궁전에서 서거 했다.
궁전의 모든시계는 지금도 09;05에정지되있다.
아타 투르크 영묘 공원 입구
입구 좌측에 있는 동상, 좌로부터 지식인,군인,농부를 상징
입구 우측에 있는 동상,좌로부터 여성지식인,여자군인,농부의 아내,농부의 아내는 안타투르크의 죽음을 슬퍼하며 울고 있다
아타투르크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영묘관
우측에서 바라본 영묘 관
안치된 영묘의 모습
전시된 생전의 주요 내용물
영묘관 앞에서 내려다본 기념관 ㄷ자형태로 건축 됐다 중요 시설들은 군인이 지킨다
경계병의 근무 교대식
어린학생들은 물론 많은 국민이 관람하고 참배한다
아타투르크 동상,
터키의 중요한 사거리등 어디서나 볼 수있는 동상
우리가 들린 조그만 식당 주인의 사무실에도 아타투르크 사진이 걸려 있다
영묘 공원에서 내려다 본 앙카라 시내 모습
앙카라시 외곽의 주택지 모습
멀리 안개에 쌓인 곳이 앙카라 시내중심부
터키의 6.25전쟁 참전 기념공원
6.25한국전쟁시 터키 참전 현황
1개 여단규모 15000여명이 참전미국 영국 카나다에 이어4번째 많이 참전하여 1000여명실종,2000여명부상,전사;721명등이었으며
전후 복구사업에도 참가하여 1978년까지 한국의 재건과 전쟁고아들을 돌보았다.
1988년 88올림픽때 터키 국방장관이 참석했으나 별로 환대를 받지못하여 터키에서는 상당히 섭섭함을 갖게 되었다고 함
사실 터키는 군을 상당히 우선하는 나라로서 터키 국방장관은 대통령 다음으로 실세로서 터키 대통령의 참석 못지 않게 생각 했으나 우리나라의
의전에서는 약간 간과 되었던 것 같음.
1999년 터키에 대 지진이 일어 났을때 이시형 박사등 민간 주도로 100만$을 모금을 하여 터키 정부에 전달한 결과 터키 국영방송 주요뉴스앵커가
직접 형제의 나라 코레아에서 이렇케 후한 구호금을 보내왔다고 보도함으로서 전 터키 국민이 코레아에 감사하며 형제의 나라는 다르다는 을 각인
하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고 교민이 말하기도 했다.
또 터키는 3명이상이 모이면 축구를 하고 축구를 보기 위해 위성방송을 볼 정도이며,터키에는 축구 전문 위성방송체널이 60개나 된단다.
그런 터키 국민이 2002년 축구 월드컵시 서울 예선에서 터키와 브라질간의 예선 주심에 한국심판이 배정되어 오심으로 터키에 불리한 판정을 내리자
그 분노로 교민들은 신변의 안전을 걱정할 정도였다고 하며,그러나 4강전에서 우리와 터키가 맞붙게 되었을 때 우리 응눤단 붉은 악마들이 터키 응원단을
편성하여 우리와 똑같이 터키 대형 국기를 만들어 펴 보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적극적으로 터키를 응원하는 것을 중계로 본 터키 국민은 고맙고
감격해서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그후 그때 사용된 터키 국기를 터키에 양도해 주기를 붉은 악마 등원단에 요청되어
그 국기가 앙카라 국립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고 한 교민이 전해 주었다.
그후 터키는 코레아라는 말만 들어도 환대하며 실제 우리가 만난 노파 할머니도 내가 코레아라 했더니 껴안고 악수를 청하며 기념사진을 찍자고 했다.
앙카라 시내에 있는 6.25 전쟁 참전 기념공원
다보탑을 뽄따 만든 기념탑--좌우에는 참전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우리 일행도 작으나마 꽃다발을 준비 하여 헌화 했다
다 같이 묵념을 하는등 경건한 마음으로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의 희생에 감사했다
터키의 6.25전쟁 참전 기념비문
앙카라에서 터키중부 내륙 지역인 카파토키아로 이동
터키 중부 내륙은 1000~2000 m의 고원 지대이며 비가 많지 않은 사막형 기후 지대다
터키 중부 내륙에 있는 소금호수--터키소금의 25%를 이곳에서 생산
대단히 매끄럽워 피부미용에 좋다나? 여름철에는 기후가 건조하여 저절로 소금이 만들어 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