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청천의 개봉
개봉부
개봉부 현황
** 위치; 하남성 개봉시 포공동 호북안으로 하남성 성도인 정주에서 동쪽으로 72km 위치에 있으며 5개구(區)와 5개 현(縣)을 관할하고 있다.
** 면적; 6,444㎢이고
** 인구;약 480만명이며 그 중 시구(市區)는 359㎢의 면적에 인구 약80만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과거 북송시대에는 지금보다 많은 100만 여명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였으며,강남의 여러 도시와 수로(운하)로 연결되어 있어
천하의 요회(要會)라 했다
**과거의 개봉;고대 중국의 3대 고도(서안(西安), 낙양(洛陽), 개봉(開封)중의 하나였으며
이 중에서 개봉은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오대(五代)의 후양(後梁),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 북송(北宋), 금(金)
등 7개왕조의 도읍이었던 유서깊은 도시로 ′7조 도회(七朝都會)′로불리기도 한다.
.**본래의 모습을 잃은 이유와 시기;북송때 부터 연이은 전란과 홍수로 황하강이 범람하여 도시 전체가 매몰되었다.홍수는 13세기에서20세기어간에
무려 360차례나 발생하여 황하가 범람했으며, 특히 명나라 숭정(崇禎)15년(1642년)황하의 범람으로 순식간에 매몰되었으며
그 주변이 호수로 변했으며 지금 개봉부 대문이 있는 바로 앞의 포공호도 그때 생긴 호수이며
이 포공호 바닥의 13m 지하에 당시의 개봉부 청사가 매몰되었다
이탈리아의 폼페이가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묻혀버린 도시라 한다면, 개봉은 홍수에 의해 지하로 묻혀버린 도시라 할 수있다.
봄페이의 재현과 같이 개봉의 재현이 가능하고 과연 화려했던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현재의 개봉부 ; 개봉지역의 땅 밑에는 송나라 왕조의 유적이 매몰되어 있어 개인적 발굴이나 개발이 금지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지하를 깊이 굴토할 수 없어서 6층이상의 건물도 올릴 수 없으며 그래서 지하철 건설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개봉은 곳곳에 아름다운 호수를 만들고 개봉부와 용정공원,청명상하원 등을 북송시대 옛 모습으로 재
현하여 놓고 화려했던 지난날을 추억하게 하며, 특히개봉부 관청지역은 당시모습의 1/4로 축소하여 2002년에 개장하였고
그곳에서 송나라시대의 각종 공연도 보여주면서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북송(北宋)
북송(960년-1126) ; 조광윤이 五代 최후의 왕조 후주에게서 선양을 받아 개봉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송이라 했으나
금나라의 침략을 받고 황하강 남쪽으로 남하하여 남송으로 이어졌으나 이 남송과 구별하기 위하여 북송이라 불렀다.
개봉부 관아 입구
아래사진들은 개봉부 앞의 풍광들
여기 대문앞 광장에서 초청천 관련 연극등을 하며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해태라는 상상의 동물이 정의롭지 못한사람을 뿔로 들이 받는다는 뜻
관광객등 손님을 기다리는 자전거 인력거
포공호(옛날의 개봉부가 황하의범랍으로매몰된곳에 호수가 생겼다)수상보트관리 할아버지
입장권 (50위안)을 구매하는동안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
제2문;의문(儀門);귀빈의 영접시에 의전 행사를 하던 문
신문고
의문 입구 좌 우에 우리나라 세종때 신문고 처럼 징과 북을 달아놓고 억울한 백성이 알리게 했다
돌비석뒤가 정청(政廳);정무를 보는곳. 좌,우에 좌청과 우청이 있다
제3문인 정청안에 들어서면 개봉부의 도장이 세워져 있다
법치와 공명정대함을 엄숙히 말해주는 것 같다
정청의 오른쪽에 있는 보조관청인 우청
좌청
정청(政廳)내 중아에 걸려있는 현판, 법치의 엄숙함에 숙연해 진다
여기가 중요업무를 처리하는 곳
포청천의 의사 결정과정을 보여주는 회의 모습
포청천 동상
포청천 (999년-1062년) ; 본명이 포증(包拯)이요.시호는 효숙(孝肅), 자는 희인(希仁)으로
지금의 안후이성의 허페이( 여주(廬州) 합비(合肥) 에서 태어났다.
북송의 천성5년(1027년,인종5년)에 진사에 급제하여 안후이성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에 임명되었으나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가 ,
1037년 다시 천장현(天長縣:지금의 안후이성 천장현) 지현에 임명된 뒤 감찰어사(監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등을 지냈다. 이어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와 지간원(知諫院) 등을 거쳐
1056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가 되었으며 1061년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임명되었다
개봉부에서는 1년 4개월 근무 하였으나 그동안 우리가 아는 그 엄청난 비리척결 사건들을 처리했다.
1061년 가우6년 추밀부사까지 승진하였고 1062년 향년 64세로 병사하였다.
사후에 예부상서로 까지 추대되었던 우리나라 이조의 황희정승같은 분이었다고 본다
송나라의 정치가. 지방관으로서 부당한 세금을 없앴으며, 판관이 되어 부패한 정치가들을 엄정하게 처벌하였다.
청백리로 칭송되었으며, 병사 후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포증집(包拯集)》《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 등이 남아 있다.
얼굴모습이 얼마나 정확한 고정을 거쳤는지는 모르지만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다
그 유명한 용,호랑이,개작두이다 -길이 1m 정도
개작두는 평민, 호작두는 고관층, 용작두는 황족의 목을 벨때 사용했다
"작두를 열어라!!(카이쟈)"라고 하던 포청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포청천이 등장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
당시 북송은 범중엄(范仲淹)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 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
특히 경성 개봉부(開封府)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가우(嘉祐) 원년(1056) 12월, 이러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하에서 인종(仁宗)은 개봉(開封)의 질서를 정돈할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은 북송의 수도로서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서울과 경기도를 합친 형태의 관할구역으로 보면 적절할것 같다)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곳이였으며 개봉부는 이 지역의 핸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관청이었다.
포청천 이전에는 그 누구도 그 직책을 맡고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뇌물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 이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대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 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곤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 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 이상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
어느 해에 개봉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곳의 수로가 막혀 배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상조사에 나선 포증은 어떤 환관과 권문세족이 수로를 점유하고 거기에 화원과 누각을 만들었기 때문에 수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포증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들에게 수로 위에 세운 모든 건축물을 철거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것을 철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봉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억지를 쓰며 땅문서를 꺼내 그 땅이 자기 소유라고 강변하였다.
포증은 다시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 그 땅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에 화가난 포증은 그에게 강제 철거 명령을 내리고 상소를 올려 그 사실을 인종에게 고하였다.결국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화원을 철거하였다.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다는 사실들은 전해들은 개봉부의 권문세족들은 함부로 나쁜짓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후 개봉부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포증이 청렴한 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이다."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
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떤 친척이 그를 후원자로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우 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사생활은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인 1062년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죽었다.
포증은 살아서는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민간들 사회에서는 포공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부패한 권세가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이야기들과 포공의 재판을 다룬
희곡·소설 등이 많이 전해지게 되었는데,
남송(南宋)과 금대(金代)에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희곡 등이 출현하였으며,
원대(元代),명대(明代),청대(淸代)를 거치면서 ′삼협오의(三俠五義)′,′칠협오의(七俠五義)′등의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역사적으로는 유명한 포공희(包公戱)가 많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희곡과 소설 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은 많이 전해지고 있다.
희곡 속에서는 청백리 포증의 형상 뿐만 아니라 장룡(張龍),조호(趙虎),왕조(王朝),마한(馬漢),공손선생(公孫先生),남협전소(南俠展昭) 등이
함께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뛰어난 기량으로 포증을 도우면서 부정을 저지른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은 물론 모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이때 포공은 항상 손에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성지와도 맞설 수 있는 것이었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 음양경(陰陽境) 앞에서는 염라대왕도 물러나야 하고 어떠한 요괴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민중들이 창조해 낸 것으로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근거없이 날조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증은 30여년의 재임 시절에 관직을 박탈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의법처리한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 이상이나 되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기드문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
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장요좌(張堯佐)등의 탄핵은 모두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귀비(張貴妃)의 백부 장요좌를 탄핵한 것은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건이다.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포공(包公)」극집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약 5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로인해 포증은 우리나라에서도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으며 그는 이미 시공
을 초월하여 청백리(淸白吏)와 명판관(名判官)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관아들의 아름다움 모습들
청심루;정청의 동쪽에 있는 7층 누각-당시 관원들의 휴식처 였슴
1층;초청천동상과 포공명지시(銘志詩)와 송나라 진종황제가 문관들에게 강조한것인 관리들의 심득사항 7가지인 청심7명(淸心七銘)이 있다
청심7명(淸心七銘) ; 청심(淸心),봉공(奉公),수덕(修德),책실(責實),명찰(明察),권과(權課),혁폐(革弊)
2,3,4층;역대 개뵹부인들의 초상과 동상들이 있다.
그중 알려진 사람으로 역사가인 사마광(1058년), 개혁파 왕안석, 그 뮤명한 소식(소동파)도 개봉부인었다.
5층; 송나라때의 복식과 생활모습을 밀랍등으로 만들어 전시해놓았다.
이 청심루의 계단을 따라 5층으로 올라가서 보면 개봉시내를 두루 관망할 수 있다. 4층짜리 누각이라 하나 중간층들을 합산하면 7층이다.
소동파의 적벽부
소식(소동파)는 그후에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겨우 사형은 면하고 좌천되어 황주로 가서 황주 동쪽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살면서스스로 동쪽언덕 즉 동파(東坡)라 했다.여기에서 그 뮤명한 적벽부를 지었다 .적벽부가 유명해 지자 소식은 소위 소동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불교에서 동파(東坡)는 동쪽언덕을 피안의 세계,즉 불국토의 세계를 가리키는 매우 의미갚은 말이다.
따라서 소식이 아마 이런것을 의식해서 동파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나도 학창시절이던 1968년 북한산 도선사에서 청담스님을 모시고 1000배등 기도정진을 하고 할때 처음으로 계를 받았는데
그때 받은 나의 법명이 동파(東坡)였다
청심루 누각에서 본 개봉전경
포공호 건너 개봉시가 보인다. 과연 개봉시에는 높은 건물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청심루에서 보는 관아도 참 아름답다
개봉부 관아내 여기저기 모습
당시의 감옥
간판과 서있는 관광객의 아이러니 한 모습-느낌이 ....
옥사가 남자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고 사형수와 일반수의 옷가가 확실히 달랐다
개봉부 뒷편의 재래시장을 둘러 보았다.재미 있고 흥미로운 장면을 담아 보았다
♥ 이 글을 보신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흔적도 좀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