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와 하조대,제4땅굴
지난 1월14일 부터 16일까지 2박3일간 속호 청간정, 낙산사, 하조대 그리고 양구 해안면 제4 땅굴을 보고 왔다.
●낙산사 의상대
양양 낙산사의 바닷가 절벽에 세워진 의상대는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낙산사는 1340여년전에 여기 바닷가 절벽의 해안동굴에 관음보샬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관음보살의 진신을 직접 친견하러 왔던 의상대사가 여기에 관음성지로서 낙산사를 세웠다는 낙산사는
관동8경중의 한곳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을것이다
다시말해 낙산사는 관음의 성지로 천수관음상과 해수관음상, 칠관음상등 모든 관음상이 봉안된 보타전이 있는 관음성지이자
천년 고찰이다
지난 2005년 4월 대형산불이 발생하여 많은 당우가 소실되었으나 국민들의 성원과 신심이 지극한 독실한 불교도들의 성원으로
중건되어 소실되기 전 보다 더 웅장하고 찬란한 모습으로 재현되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명찰이다
여기에는 바로 이 정자옆에 서 있는 관음송이 가장 일품일 것이다
낙산사가 산불에 거의 전소되다시피한 이후 많은 불사가 이루어져서 지금은 소실되기 전 보다 훨씬 규모도 커지고 정비도 잘되어 관광명소로 손색이 없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날씨가 흐리고 해서 깨끗하고 푸른 동해 바다는 볼 수 없었지만
안개낀 의상대와 홍련암등은 가히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홍련암
홍련암 마루바닥 밑의 바닷물 출입모습
홍련암에서본 의상대
하조대
하조대는 조선의 개국공신 하륜과 조준이 잠시 머물고 간 곳으로 두사람의 성을 따서 붙였다고 전해 오는 곳이다만
바닷가 기암 바위 꼭대기에 수백년은 되었을 법한 아름다운 소나무와 이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으로 더 알려져 있는 곳이다
특히 여기 일출 장면이 애국가와 함께 보여지는 영상으로 나왔기에 다욱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일출사진을 좋아하는 진사님 치고 가 보지 않은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저 바위와 저 소나무가 그 유명한 일출소나무이다
포인트도 딱 그 자리 이지만 날씨가 흐려 해는 볼 수 없었다
●제 4땅굴
북한의 전면적 기습전과 후방공략을 달성하기 위한 북한의 땅굴은 2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땅굴사업은 1971년 9월 25일 대남공작 총책 김중린(金仲麟)과 북한군 총참모장 오진우(吳振宇) 등에게 내려진
“속전속결전법을 도입하여 기습전을 감행할 수 있게 하라”는 김일성의 '9·25교시'에 따라서 시작되었다.
땅굴의 발견경위와 규모는 다음과 같다.
⑴ 제1땅굴:1974년 11월 15일 경기도 연천 고랑포(高浪浦) 북동쪽 8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약 1.2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90cm, 높이 1.2m, 길이 지하 45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1시간에 1개 연대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고, 궤도차를 이용하면 중화기와 포신(砲身)도 운반할 수 있다.
⑵ 제2땅굴:1975년 3월 24일 강원도 철원(鐵原) 북쪽 13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900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2.1m, 높이 2m, 깊이 지하 50~160m,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약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가 통과할 수 있다.
⑶ 제3땅굴:1978년 10월 17일 판문점(板門店) 남쪽 4km 지점인 군사분계선 남방 435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1.95m, 높이 2.1m, 깊이 지하 73m, 길이 약 1.6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아치형 구조물이다.
전술능력은 1시간에 3만 명의 병력과 야포 등 중화기를 통과시킬 수 있다.
⑷ 제4땅굴:1990년 3월 3일 강원 양구(楊口) 북동쪽 26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1.7m, 높이 1.7m, 깊이 지하 145m, 길이 약 2.1km에 달하는 암석층 굴진 구조물이다
제 4땅굴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이현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명 펀치볼이라는 지역이다
이 딸굴 수직 상방향의 지상은 1500m고지군으로 태백산맥의 준령이다 이능선 꼭대기가 남방한계선 지역이며
여기에 북한지역과 북한 초소가 눈앞에 보이는 지근거리에 있다.
이를 관망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을지 전망대가 설치되어 관광과 안보교육의 장이 되고 있지만
오늘은 눈으로 진입 통제가 되어 부득이 볼 수가 없어 아쉬움을 안고 되돌아 왔다.
가는길이나 세부자료등은 인터넷에서 제4땅굴을 검색하면 너무나 많은 자료가 나와 있으므로 여기에는 올리지 않는다
여기 보병제21사단은 본인이 육군소령으로 21사단 예하 연대에서 작전과장을 지냈다
그때가 1979년10월26일 고 박정희 통령께서 새해 당하시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후 광주사태등 후방의 매우 불안한 정국을 틈타 북괴군이 전면전을 시도할 만반의 준비가 이루어 지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우리도 완벽한 전쟁준비를 하던 긴박한 시기였다
부대 연병장(운동장)모퉁이에 관사가 있고 가족이 있었지만 두달가량 가족 얼굴도 보지 못하는 상황속에서
완벽한 전투준비를 독려하고 점검하고 했던 내 군대생활 중에서 가장 힘들었고 또 긴박했고 아울러 군인으로서의
긍지와 보람을 느끼던 시기였다.
참고로 그 당시 저녁마다 비 무장지대내에 있는 아군 G.P의 보고에 의하면
약1개대대 규모의 북괴군이 무장을 한채 북방한계선을 넘어 오는 것은 관측했는데
빠져 나가는 것은 보지 못했다는 보고 였다
적과 마주하고 있는 연대의 작전책임자로서 곧바로 GP에 들어가서 그 실태를 이틀동안이나 살펴 보았는데
가이 그 보고가 사실이라서 즉각 상부에 보고 하고 결전에 대비하는 초 긴장상황이 지속되었던
그 힘들고 보람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는 기회가 된 여행이었다
충견 헌터 소위 지묘
여기 땅굴 입구를 바라보고 있는 한마리의 개의 동상!!
이개는 세퍼드 종의 군견으로 1989년 땅굴이 발견되고 이듬해인 3월3일 땅굴내부를 수색할때 선두에서
탐색해 가던 이 수색견이 땅굴속 물속에 매설된 목함지뢰를 밟아 현장에서 폭사 하였다.
이로 인해 군견의 뒤를 따르며 수색을 하던 1개 분대병력이 목숨을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수색견에게 인헌 무공훈장과 함께 육군 소위의 계급이 추서되어
개의 이름인 헌트소위가 되어 동굴 입구에서 동굴을 바라보면 영원히 이 이 땅굴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