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세계여행(외국)

용문석굴,백거이 묘소

몃져 2012. 7. 11. 00:41

 

 

 

용문석굴(龍門石窟)입구

 

용문석굴

있는곳;1820년 중국이 발표한 중국 4대고도(四代古都;서안 ,낙양,남경,북경)중의 하나인 낙양시(하남성) 이천현(伊川縣)으로

                             낙양시 남쪽13km지역의 이하(伊河)강변을 따라약1.3km에 달해 조성되어 있다.(정주시로 부터 약70km)

                             이하강의 남쪽은 향산이며 북쪽 강변의 용문산 절벽에 용문석굴이 형성되어 있다.

                             이 향산에는 장개석의 별장이 이었는데 이것이 향산사로 변해 있고

                             그 동쪽으로 약200여m 지역에  유명한 백거이의 묘가 있다

                            .백거이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그린 장한가의 작가로서 당대의 최대 문인이다.

                  용문석굴;중국 3대석굴(3대석굴;돈황석굴,대동운강석굴, 낙양용문석굴)중의 하나로서

                  용문석굴 생성경위:북위(386년-534년)의 효문제가 수도를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했을때(492년)부터

                                         대동의 운강석굴을 계승하는 형식으로 뚫기 시작했고

                                         그후 동,서위(535-550년),북제(550-577년),북주(557-581년)와 그 뒤를 이은 수나라와당나라 (581-907년) 까지  

                                        약400여년간 이어져서 축조되었다. 그 중에서도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는  북위때와 당나라 측천무후 시절이라 한다

                 석굴현황;석굴2345개,비문280여개,불탑50여기,조각상이 10만 여개로서 대부분이 현존하나 전쟁과특히 근세의 공산혁명의 산물인

                             문화대혁명식에 많이 파괴되어 실상은 흄물에 가까운 것이 많다.

                            하지만 고대 중국의 400여년간의 종교,미술,음악,서예,건축,의료방면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자료의 보고로 석조각예술의 보고이다.

 

 

 낙양의 이하강

 

 주변 지형도

 내사진은 없고 우리팀사진만 있네

 

 

 

 

 당나라 때 우리나라 스님들이 조성한 석굴이나 보존상 폐쇄시켰단다.

그러나 가이더 예기와 내 짐작으로 그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출중하여 관람을 막은것으로 본다 가이더도 그렇게 말했다.

 

장개석의 별장지역이었던 곳을 개조하여 산 이름을 딴 향산사를 세웠단다.

 

 징그럽도록 파괴해 버린 불상들

그러나 불상의 크기가 제일 작은것은 1cm짜리도 있으며,

아래 불상들은 크기가 3cm 정도로 조성된 것으로 꼭 모자이크를 해 놇은것 갔았다.

그 정교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규모가 큰 봉선사 석불 

이 봉선사는 당나라 초기 측천무후가 조성한 것으로 절벽을 파서 광장을 만들고 정면에 부처님을 배치하고 측면에는 부처님 호위 무사상들을 배치한 석굴로

전체 용문석굴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크며 불상들이 우아하고 온화한 미를 자랑하는 가장 우수한 작풍이란다.

이는 중앙 부처의 얼굴상이 측천무후 자신의 얼굴을 조각했다는 설이 정설아닌 정설로 전해지고 있단다.

이 중앙불상 소위측천무후의 상은 장안의 화청지에 있는 양귀비 동상의 양귀비 얼굴과 너무나 흡사하다

 

 

 

봉선사 부처님 

석가모니불상도 아닌고 관세음 보살상도 아니고 정말 측천무후 상인것이 틀림없나 보다 

 

 

여기 중앙의 부처님이 관세음 보살님이다 그러니 분명 관세음보살은 아닌데 비구니 얼굴이니 이건 측천무후가 맞는것 같다

 

 

역시 봉선사 석불에 관광객이 제일 많이 모인다 

 

아래부터 불상들을 자세히 보면 많이 다르다.

이는 시대에 따라 조각이 달랐음을 알 수 있고 현장에는 그시대가 구분되어 있으나 불교 미술상의 문제라

 구태여 다 알것아없다고 생각되어 한데 묶어 담아 보았다

 

 

 

 

 

 

 

 

 

 

 

 

 

석가모니 부처님 주위의 만불상 

 불상의 크기가 제일 작은것은 1cm짜리도 있으며,

아래 만불상의 실제  크기가 3cm 정도로 조성된 것으로 꼭 모자이크를 해 놇은것 같았지만 이 작은 불상들이 각기 다른 표정을 하고 있으며

그 정교함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하강 남쪽 향산쪽에서 본 용문석굴 전경

줌으로 당겨본 봉선사 모습, 역시 용문석굴을 압도하고 있다

 

낙양시

낙양은 인구 450만의 호남성의 제2의 도시로 황하강의 지류인 허난성 서부 뤄허강(洛河의)유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성도(省都)인 정저우(鄭州)에서 140 km 떨어져 있다.

동주(東周)시대 이후 20여개의 크고 작은 왕조와 소위200여명의 황제가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였거나

천도 하였던  천년고도로서 BC11세기 주나라 성왕의 동방경영의 기지로서 당시에는  낙읍이라 했다.

 그후 BC770년 주왕조가 산시성의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한 후 동주의 수도로 번성하였고 후한과 삼국의 위와 서진도 이곳을 도읍으로 했다.

 

    한편 정식 명칭은 전한(前漢)때 까지 낙읍(洛邑)으로 불리다가, 후한이 AD25년에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의 명칭인 뤄양(洛陽)으로 불렀다.

  후에 북위(北魏) 가 화북지역을 평정하자 북위의 효문제(孝文帝)가 산시(山西)의 다동(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였다.

  그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605년 전란으로 황폐해진 북위의 뤄양성 서쪽에 새로운 성을 쌓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뤄양의 전신이다.

   

    당나라때도 부도로서 동도하남부라 불렀다.

 수,당대까지  중국의 정치 중심지였던 장안(서안)은 당시 인구 120만명의 크나큰 도시였으나 물이 부족하여 농업이 안되어 이하강과 낙하강의 양대 강을 끼고 있는뤄양(洛陽)은 물이 많아 농사가번창했으며 대운하를 통한 남방의 물자 집산지로서 경제적으로 번창하였으므로  서안에 이은 부도읍지로서 번창하였다.특히 측천무후가 죽기전 20여년을 여기서 살았었던 도시다.그러나북송때까지 서경으로 불렀으나 원,명,청나라 때에는 지방도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낙양의 지하에는 엄청난 고대 문화재가 매장되어 있는것으로 추정되어 지하철 건설도 허가되지 않고 있단다.

다음은 북송대의 이름난 그 포청천으로 유명한 개봉지역을 관광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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