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릉
고려왕조는 AD918년 왕건이 건국한 이래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울때 까지 34대에 걸쳐 475년간 유지되었던 나라다.
그러나 우리는 이씨조선의 역사 보다는 고려의 역사에 대해 대체로 잘 모른다.
그런측면에서 고려의 왕실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재 조명해 보고 이에 따른 정치, 경제, 사회를 들여다 봄으로써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본다.
고려왕조의 계보를 시대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의 4단계로 나누어 볼수 있다.
I.왕권 쟁탈기(918년~1122년);204년간
918년 고려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는 과정은 대부분이 다 잘알고 있다.
궁예의 휘하에서 절취부심 하여 후 고구려의 뒤를 이어 고려라는 나라를 세우고 기반을 딱는 과정에서 각 지방호족들과 신라 백제의 후예들을
의식하여 혼인관계를 통하여 개척해 나갔다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이 과정에서 왕건 재위 25년간 29명의 왕비를 두게되어 그 왕비들의 소생들에
의한 왕족의 복잡다단한 현실은 왕권다툼으로 이어져 소위 왕위 쟁탈전을 방불케 하는 시기를 말한다.
제1대 태조(918~943);25년, 2대 혜종;2년, 3대 정종;3년, 4대 광종;26년, 5대 경종;6년, 6대 성종;16년, 7대 목종;12년,
8대 현종;21년(1010~1031), 9대 덕종;3년(현종의 장남), 10대 정종;12년(현종의 2남), 11대 문종;37년(현종의 3남),
12대 순종;3개월(문종의 장남)13대 선종;10년(문종의 2남), 14대 헌종;2년(선종의 원자), 15대 숙종;10년(문종의 3남)-조카로부터 왕위 찬탈,
16대 예종;17년(숙종의 장남), 1105년에서 1122년간의 왕위 쟁탈전에서 다시 장남이 등극하여 사슬을 끊음.
이때 이자겸이 등장하며, 뒤에 척준경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킴
공양왕릉
상상을 초월한 초라한 공양왕 왕릉
II.무신(武臣)들의 반란기 (1122년~1259년);137년간
17대 인종;24년,예종의 장남-이자겸의 난,묘청의난, 김부식의 삼국사기
18대 의종;24년(인종의 장자-정중부가 폐위시킴). 19대 명종;27년, 20대 신종;7년 21대 희종;7년 22대 강종;1년
23대 고종;46년(1213~1259년)-거란,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 1232년-1257년 거란의 7차침입후 태자를 보내 정식항복교섭
1258년 최의의 피살로 무신정권이 끝난다.
III.몽고 지배기(1259년~1356년) ; 97년간(실제지배는 1232년부터 시작됨-125년간)
24대 원종;15년(11년에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 25대 충열왕;34년(이때부터 왕이라 불렀다). 26대 충선왕;12년.
27대 충숙왕;16년+7년(충혜왕과 교대). 28대 충혜왕;2년+5년. 29대 충목왕;4년. 30대 충정왕;2년-충헤왕의 서자.
31대 공민왕;23년(1351년~1374년)-충숙왕의 2남-1356년 원에서 독립,1368년 명나라 건국으로 명과 협력 최만생에게 피살됨
IIII.망국기(1356년~1392년);36년간
32대 우왕;13년-신돈의 아들여부 시비, 반야의 소생으로 11세에 왕위에 오름.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왕에서 폐위됨
33대 창왕;1년-우왕의 아들로 8세에 왕위에 오름-강화도로 쫓겨나서 살해됨
34대 공양왕;3년(1389년~1392년)-20대 신종의 7세손으로 1345년 출생하여 1394년에 사망함 향연49세-1390년 한양천도(도선비록)다음해에 환도
공양왕 (1345년충목왕1년에 탄생하여1394년태조3년에 사망한 고려의 마지막왕)
이성계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된 후 신진사대부의 세력확장에 이용되는 등 불운하게 생을 마쳤다.
20대 신종의 7대손으로 이름은 요(瑤), 아버지는 정원 부원군 균(定原府院君, 鈞), 어머니는 국대비왕씨(國大妃王氏)이다.
비(부인)는 창성군(昌成君) 진(稹)의 딸 순비노씨이다.
1389년 이성계.심덕부 등에 의해 창왕이 페위되자 왕위에 올랐다.즉위후 이성계 일파의 압력으로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
사회전반에 대한 제도개편을 단행했으나, 이는 신진사대부들이 자기들의 세력기반 확립을 위한 개혁이었다.
1391년 정몽주를 살해한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은 과제를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의 6조로 개편하였다.
유학진흥을 위하여 유학 교수관을 두었으며 과거시험에 무과를 신설했다. 배불숭유론에 의해 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오교양종(五敎兩宗)을 없애
군사에 보충하고,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각 관사에 분속시켰다.
경제면에서는 1391년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을 서강에 세워 조운의 곡식을 비축하게 했으며,개성 오부에는 의창(義倉)을 설치했다.
신흥세력의 경제기반을 다지기위해 과전법을 실시했으며,인물추고도감을 두어 노비결송법을 정했다.
남은(南誾)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1392년 폐위되었다. 1392년 공양군으로 강등되었고,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1394년 삼척부(三陟府)에서 두 아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능은 고릉(高陵)이다.
34대 475년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왕릉으로서는 정말 초라한 모습이다
왕릉을 지키는 삽살개
공양왕릉을 지키는 삽살개에 대한 전설
위의 왕릏과 삽살개에 대한 전설은 이조 초기에 이성계에 의해 조작된것이란 설이 거의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공양왕은 폐위되어 공양군으로 봉해진후 삼척으로 유배되어 갔고 그곳에서 사사되었다는 것이며,그 쪽에도 공양왕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소위 정부(이성계)에서 조작했을까? 그것은 당시 혁명정부에 대한 고려유민과 뜻있는 선비들의 격한 반대를 의식했던 것으로 본다.
왕릉 좌,우에 서 있는 무신석 한쌍, 땡그렁 한쌍 뿐이고 그 앞에 삽살개가 지키고 있다
최영(崔瑩) 장군
■ 탄생/족보 ;최영장군은 1316년 충숙왕3년에 태어나 1388년 우왕14년12월에 이성계에 의해 사형당하였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5세손인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영의 5대조 할아버지인 최유청(1095~1174)이 수사공집현전대학사판예부사로 치사할 만큼 명문가의 자손.
■주요경력
1352년 - 조일신의 난 진압, 호군(護軍) 임명
1354년 - 원나라의 요청으로 홍건적 진압을 위해 출병
1355년 - 원정에서 귀국
1357년 - 동북면체복사 임명
1358년 -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伏兵)을
이용하여 격파
1359년 - 홍건적의 1차 침입. 서경이 함락당하자 생양(生陽), 철화(鐵和), 서경, 함종(咸從) 등에서 적을 격파하여 몰아냄
1360년 - 평양윤 겸 서북면 순문사로 임명
1361년 - 서북면 도순찰사(西北面都巡察使)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가 됨. 이 해에 홍건적 2차 침입(10만 명). 개경까지 침입한
홍건적 격퇴
1362년 -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패퇴시키고 개경 수복. 같은 해, 재상 김용(金鏞)의 역모 진압. 공민왕은 그 전 해의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
1364년 - 덕흥군을 왕으로 내세운 최유가 군사 1만을 이끌고 지금의 선천에 주둔하자 이성계와 협력하여 최유를 몰아냄
1365년 - 강화도에서 왜구와 싸우던 중 신돈의 모함으로 벼슬에서 물러남
1371년 - 신돈이 처형된 후 복직
1373년 - 육도 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로 임명
1374년 - 명나라의 제주도산 조랑말 2000마리를 요구에, 제주도의 몽고인 목호들이 300필만 내놓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
1375년 - 우왕 판삼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
1376년 -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왜구가 침입하여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하자, 출정을 자원하여 홍산(鴻山 :
지금의 부여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됨
1377년 - 도통사로서 강화·통진(通津)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1378년 - 현재의 풍덕천인 승천부에서 왜구 침입 격퇴
1379년 - 해도도통사(海道都統使)가 되어 동서강(東西江)에 나가 왜구를 막다가 병에 걸림
1380년 - 수시중(守侍中)이 됨
1384년 -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벼슬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됨
1388년 - 두번째로 문하시중이 됨
1388년 - 음력 3월에 팔도 도통사가 되어 옛 고구려 땅인 요동 정벌에 나섬. 그러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체포되어 유배
1388년 - 음력 12월 개성 순군옥에서 죽음
묘소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는 야트막한 산자락
장군의 무덤 위에는 장군의 아버지인 원직공과 어머니 조씨의 합장묘가 자리하고 있다. 무덤 앞에는 고려 우왕 때 세운 갓형의 비석이 있다.
위아래 두 개의 무덤 뒤로 곡장(曲墻)이 둘러쳐져 있어 앞에서 보면 마치 하나의 묘역인 듯 보인다.
최영장군의 묘는 직사각형으로 봉분의 밑바닥에 밑돌을 둘렀으며 무덤 앞에는 두 개의 문인석과 망두석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상석과 향로석은 최영장군의 상석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 같으며, 묘비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나 머릿돌은 중간에 한 번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의 규모로 본다면 누가 고려 명신이었던 최영장군의 묘소라 믿겠는가. 모름지기 세상인심이란 그런 것이다. 반군과의 싸움에 패하고 죽임까지 당했으니 바뀐 왕조에서 지나치게 홀대한 것을 두고 비례를 얘기한 들 무엇하리. 그동안 단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름에 비해 여전히 초라한 묘소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최영장군 묘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묘로 사각의 봉분에 2단의 둘레석을 쌓았다.
상석과 향로석은 최영장군의 상석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것 같으며, 묘비는 당시의 것으로 보이나 머릿돌은 중간에 한 번 교체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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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장군 부모님의 합장묘(뒤쪽의 묘)
뒤쪽에서 바라본 전경,잔디가 없는 봉분이 장군의 부모님묘
최영 장군의 무덤은 봉분에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하여 붉은 무덤, 즉 적분(赤墳)이라 불린다.
당초 이성계가 최영을 처형할 때 마땅한 죄목이 없으매 벼슬아치로서 지나치게 탐욕스러웠다는 죄를 씌우게 된다.
그러자 최영 장군은 참형에 앞서 “만약 내가 청렴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결백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그의 무덤에는 오랫동안 풀이 자라지 않았으며, 붉은 황토의 무덤은 오래오래 그의 결백을 알렸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에 이르러 그의 충절을 흠모했던 관리들이 붉은 무덤에 사토를 더하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근자에는 경기도에서 최영장군묘를 시도기념물 23호로 지정하면서 무덤을 잘 관리한 탓에 풀이 잘 자랐다.
문인석의 얼굴이 깨졌는데 이는 총탄에 의한것으로 보인다 아마 6.25전쟁때 총탄이 아닌가 싶다
최영(崔瑩) 장군은 고려 말 우왕(禑王) 때의 무신으로서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떠받치는 두 기둥이었다.
최영 장군은 홍건적이 서경을 함락하자 이를 물리쳤고, 또한 개경이 점령되자 이를 격퇴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난을 진압했으며, 왜구가 창궐하자 홍산에서 적을 대파하기도 했다.
그런데 명(明)나라가 고려의 북변 일대를 자기들의 영토에 귀속시키려 하자 군사를 일으켜 요동정벌(遼東征伐)에 나선다.
하지만 친명파였던 우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는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이르자 말 머리를 돌려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된다.
그리고 장군은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반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에 맞서 싸우다 결국 체포된다.
그리고 고봉현(高峰縣:지금의 고양)에 유배당했다가 그 뒤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으니 그 때 그의 나이 73세였다.
서서히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지탱하려 안간힘을 다했던 최영 장군의 생애는 이렇게 허망하게 막을 내린다.
최영의 죽음은 한 인물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곧 고려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진다.
이성계는 최영과 정몽주를 제거한 뒤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개국하게 되니 후세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역성혁명(易姓革命)이라 말한다.
왕조의 멸망도 그러하려니와 한 나라의 최고 장수로서 부하에게 죽임을 당할 때의 배신감이야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최영 장군이 처형당하자 장군의 손서(孫壻)이자 조선의 청백리로 정승을 지낸 고불(古佛) 맹사성이 시신을 수습하여 최영 장군의 부모 묘역 아래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참형한지 8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억울하게 죽은 장군의 넋을 위로하였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은 최영 장군 아버지의 유훈(遺訓)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 최영직은 사헌부(司憲府) 간관이었다.
사헌부는 관리들의 잘못을 조사하여 그 죄를 엄히 다스리는 관청이었으니 그 아버지다운 유훈이었던 셈이다.
원직공이 별세했을 때 장군의 나이 16세였다. 장군은 평소 아버지의 유훈이었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
즉 ‘見金如石(견금여석)’ 넉 자를 큰 띠에 써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하루는 관직을 시작한 정몽주가 당시 재상이었던 최영의 집에 들렀는데 집은 기어들어가야 할 정도로 초라했고, 방은 흙벽이었으며,
바닥의 멍석에는 벼룩이 뛰어다니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재상의 자리에 올랐지만 유훈에 따라 뇌물을 멀리하고 청탁을 받지 않은 까닭이었다.
따라서 최영은 모든 벼슬아치들이 본받아야 할 청렴결백의 사표였다.
최영장군 노래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고
한평생 나라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여 최영장군
이나라 이겨례 바로잡고자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북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셨으니
장하다 그 이름 최영장군
한국국제협력단(KOICA)은 우리나라와 개발도상국가와의 우호협력관계를 증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으로 경기도 성남시에 있다.
이곳의 연수센터에서는 동남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의 공무원들을 초청해 연수를 시키고 있는데
연수센터의 벽면에 최영 장군의 상반신을 부조(浮彫)로 깎아 세웠으며
그 아래에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Look at gold as if it is a valueless stone)’는 최영 장군 아버지의 유훈을 한글과 영문으로 새겨놓았다.
이는 저개발국가의 공직자들에게 청렴결백을 가르치려 함이리라.
그런데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부패지수가 그 어느 나라보다도 훨씬 높다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니겠는가.
당장이라도 최영 장군이 벽면으로부터 상반신을 불쑥 내밀고 버럭 호통이라도 칠 것 같다.
아!! 아!!
오늘날 같이 험난하고 언제 결단날지 모를것 같은 세상!
제 잘 났다고 떠들고 자기 아니면 안되고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기자신의 인격과 뼈대를 헌신짝같이 내 던지는 것은 물론이고
나라와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눈하나 깜짝 안하는 무리들과 그 간신배들이 들 끌는 이 개판(?),이 세상에
정말 최영장군 같은,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 홀연히 나타나 이나라를 다시 천년 사직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을까!!!
천지 심명이여! 최영장군님의 신령이여!부디 빨리 강림 하시어 이 나라를 구해 주소서!!
♥ 이 글을 보신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흔적도 좀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