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릉
조선 제 6대 왕 단종의 비 정순왕후 무덤이다
지정번호 : 사적 제 209호
지정일 : 1970년 05월 26일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산 65-1
크기 : 면적 146,529㎡
정순왕후의 일생요약
정순왕후는 1453년 단종1년에 그녀 나이 14세때 한살 아래인 단종의 비로 간택되었으며,
1년후인 1454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다시 1년후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함으로서 왕대비가 되었다가
2년후인 1457년 그녀 나이 18살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됨으로써 부인(夫人)으로 강등됨은 물론
이때부터 생일별이 시작되었고 그후 단종이 사약을 받고 죽을때 까지 한번도 상면하지 못하였다.
1521년 중종16년 82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 까지64년간 어려운 생활고와 온갖 고초를 격으면서
오로지 먼저간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정순왕후 송씨는 1440년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태어나서 대가의 규수로 잘 성장하여 15살의 나이에 한 살 년하인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다.
당시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영의정 등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었다.
수양대군은 드디어 안평대군 마저 강화도 로 유배시킨후 사사(賜死)했다.
이에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왕비 송씨는 왕비에서 의덕왕대비로 물러서게 되었는데 이때나이 16살이었다.
그 다음해에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왕대비는 군부인으로 되고 만다.
그후 수양대군의 동생 금성대군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면서 단종은 대역죄인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송씨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궁궐을 떠나야 했다.
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14살에 결혼하고 15살에 왕비가 되었다가 16살에 왕대비로 물러났고 17살에 서인이 되는 인생 역정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 정순와후의 부모는 물론 3족을 멸하는 대역죄인이 되어 살해됨으로서 졸지에 과부요 고아가 되었다.
이것이 권력다툼에서 벌어진 냉엄한 현실이었으니...한 여자의 기구한 운명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정순왕후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궁을 떠나야 했기에 함께 있던 시녀 3명과 후궁2명과 함께 삼각산 청룡사 휘하의 정업원으로 출발한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청룡사
조선시대에 왕자등 자식도 없이 과부가 된 왕비나 후궁들은 대개 여승이 되어 왕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냈다.
바로 정업원(淨業院)의 그 업(業)이란 왕을 모시는 기쁨과 함께 왕 만을 모셔야 하는 족쇄로서의 운명을 업으로 알고
살라고 하는 바로 그 업인 것이었다
정순왕후는 그의 뜻에 따른 시녀3명과 후궁2명과 함께 이곳 청룡사의 우화루에 거처를 마련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영월로 유배를 떠나던 단종(노산군)이 이 우화루에 도착하여 왕후와 함께 하룻밤을 머물며 이별을 준비했다.
이튿날 동대문 옆에 있는 영도교까지 나가 단종을 배웅하지만 더이상 따라 갈 수 없었다.
정순왕후의 나이17세, 결혼한지 3년 째 였었다.
오늘날의 영도교 모습
영도교는 도성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다리로서 원래 석조다리였으나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때 이 다리 돌을 경복궁에 쓰고
목재로 만들어져 오늘날에 이르다가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영도교도 복원되었다.
정순왕후가 청룡사에서 여기까지 나와 단종을 배웅하지만 더 이상 가는 것이 제지 됨으로써
이다리가 단종과 영원한 이별 장소가 된 것이다.
후세에 단종이 영원히 건너간 다리라 하여 영도교라고도 하고 정순왕후와 영원히 이별을 나눈 다리라 하여 영리교(永離橋)로도 불리었다.
단종을 떠나보낸 정순왕후는 청룡사에 돌아와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머리를 깎고 청룡사의 비구니스님이신 지진(知眞)스님으로부터
허경(虛鏡)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동정곡(同情哭)과 동망봉(同望峰)
허경스님이 된 정순왕후는 매일 청룡사 뒷 산에 올라 오로지 영월을 향해 단종의 안녕만을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그 애절한 여인의피맺힌 절규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10월말에 단종이 사사(賜死)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무리 세속과 인연을 끊었다고 하지만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있을까!!
그래도 이승의 모질고 질긴 업연을 삭히기 위하여 매일 뒷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또 울고 하였다.
매일 어렇게 뒷산에 올라가 통곡을 하는데 곡(哭)소리가 산아래 마을까지 들리면서 온 마을 여인네 들이 땅 한번 치고, 가슴 한 번을
치며 동정하는 곡을 하였는데 이를 동정곡이라 하였다.
그리고 매일 올라갔던 청룡사 뒷 산의 봉우리를 동망봉이라 불렀다
후대에 동망봉 위치에 비석을 세우고 정자를 세워 동망정(東望亭)이라고 이름 지었다.이동망정에서는 동대문 옆 영도교가 보인다,
영조가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써주고 이곳 바위에 새기게 하였는데 ,
일제(日帝)강점기에 일제는 여기에 채석장을 만들어 그 글씨는 찾을 수가 없다.
아래 사진은 최근에 복원해 놓은 것이다.
동망정
허경스님(정순왕후)은 같이 비구니가 된 시녀들이 탁발해온 음식으로 끼니를 이었다. 이에 수양대군(세조)이 성안에 영빈전(英嬪殿)이라는
집을 지어 주고 식량을 내렸으나 정순와후는 끝내 이를 거절하고 탁발로 생활했다.
그러나 당시 숭유억불 정책을 따르던 조선사회의 승려들의 생활은 그리 넉넉치 않았다. 정순왕후도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업(染色業)으로 생업을
이어 갔는데 이는 정순왕후의 순결하고 때뭇지 않은 여생을 보여주며, 지금도 이 골짜기를 자줏골이라고 부른다.
염색업 일에 사용되었던 우물이 복원되어 있다
순정왕후 허경스님이 염색업을 할때 사용되었던 우물의 복원된 모습
1521년 중종16년에 8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자 중종의 명에의거 대군부인의 禮로 장사 지내게 했다.
후사(자식)가 없었기에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의 시집인 해주 정씨의 집안에서 주선하여 장사를 지내고 해주 정씨의 묘역에 안장했다.
1698년 숙종24년에 단종과 정순왕후가 복위되면서 묘는 능으로 봉해 졌지만 해주 정씨의 묘역은 정순왕후를 사후에 돌본 공으로
이장되지 않고 현재와 같이 그자리에 남게 된다. 정순왕후 묘역 뒤우편에 아직도 해주 정씨의 선산이 그대로 있다.
원래 조선의 국법상 왕이나 왕후의 능침으로 지정되면 일정 거리내 일반묘는 이장되게 되어 있었다.
능이야 그렇다 치고 14세에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15세에 왕비로 책봉되었다가 17세에 폐서인이 되어 스님이 되고
그후 82세로 생을 마감 할때 까지 64년의 인고(忍苦)의 세월!! 동대문 밖 정업원(지금의 종로구 숭인동)에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단종을 애도하고 그리워 하면서 살아간 그녀의 삶!, 자식하나 없이 살아간 그녀!, 오로지 남편의 명복만을 빌면서 평생 서인으로
살아간 그녀의 아날로그적 사랑!!
한편오로는 그러한 고통속에서도 일생을 살면서 두고 두고 사랑할 수 있고 잊지 못할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은 어찌보면
오늘날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로서 그것 자체 만으로도 행복한 삶이 아니었을까?
여기 사릉은 정말 아름다운 소나무로 유명하다. 넓고 울창한 소나무 숲이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
또한 사릉에는 왕실 전통 수목 종묘장이 있다
사릉 종묘장을 관리하는 분의 말은
"그간 사릉이 사적지로 보존되어 왔으나 역사적으로 큰의미를 갖지 못한 이유로 수차례의
관람허용에도 그다지 많은 관광객이 찾지않아
비공개로 이곳을 운영해오던중 그나마 산림보호가 잘되어있던 지난 72년부터
종묘장으로서의 역활에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고 종묘장의 설명한다.
또"사릉종묘장의 경우 문화재청에서도 필수적인
각 유적지 관리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경용 소나무와 유적지를 더욱 운치있게 만드는
백송등을 키워내 공급하고 있어 사릉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사릉종묘장은 1만평 부지에 소나무외 82종,약 2만주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
경복궁을 비롯한 옛 왕실의 권위와 유적의 가치를더욱 살려 나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 했다.
사릉의 묭묘장과 양묘장, 진입로 주변에는 팻말을 붙인 아름다운 꽃들과 야생화로도 유명하다
사릉의 연꽃
온릉
개요 ; ● 위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 19번지
● 조선 11대왕 중종의 정비(正妃) 단경왕후 윤씨의 릉
● 본관 ; 거창신씨, 부친 ; 익창 부원군 신수근 ,모친 ; 청원 부부인 한씨
● 출생 ;1487년(성종18년)1월 14일
※ 조선 왕비중 7일 이라는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지낸 왕비
1499년 (연산군5년) 진성대군과 혼인하여 부부인이됨. 이로서 연산군의 부인이자 왕비였던 거창신씨가 신수근의 누이동생이므로
왕비 신씨와는 사가의 관계로는 고모와 조카 사이가 되고, 진성대군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므로 왕족으로는 동서지간이다.
얽힌 사연
연산군 5년(1499)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과 혼인하여 부부인에 봉해지고, 1506년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즉위하자 왕후에 올랐다.
그러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로 연산군 축출을 위한 반정에 반대한 일로 성희안(成希顔) 등에게 살해되면서 공신들의 압력으로 7일만에 폐위되어 세조의 사위인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영의정 정인지의 아들)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다.
중종 10년(1515)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죽음을 계기로 김정(金淨)‧박상(朴祥) 등이 복위운동을 폈으나, 이행(李荇)‧권민수(權敏手) 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명종 12년(1557) 71세로 소생없이 승하하여 친정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후 숙종 24년(1698)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고, 영조 15년(1739) 복위되어 묘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하고, 단종의 장릉 및 추봉된 왕비릉인 정릉(貞陵), 사릉(思陵)의 상설 례를 따르게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갖춰졌다.
반정세력들은 처음엔 신수근과 협조하고 그의 사위 되시는 진성대군을 왕으로 모시자고 했으나 신수근은 이를 반대했다.
결국 반정 세력들은 신수근을 죽이고 중종을 옹립했다.
조선의 왕후 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비의 자리에서 폐출 된 비운의 왕비들이 있다.
단종의 비 송씨가 그러하고, 연산군의 비 신씨가 그러했으며, 중종의 비 신씨가 그러했다.
또한 훗날의 광해군의 비 유씨도 그러한 비련을 겪게 도있다.
그러나, 단종, 연산군, 광해군은 모두 반정, 즉 구테타에 의한 폐출로 '서방 잘못만난 탓'일수도 있겠지만,
단경왕후 신씨는 반정에 성공한 임금의 부인이면서도 폐출이 된 비련의 왕비이다.
연산군5년(1499년),
성종의 둘째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리고, 신씨는부부인(府夫人)으로 봉해지고. 진성대군보다 한살 많았으나,
부부의애정은 매우 두터웠다고 전하고 있다.
만일 연산군의 폭정이 아니었다면 단경왕후의 삶은 평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신수근은 반정세력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으며, 누이와 딸은 왕후의 자리에서 폐위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연산군12년(1506년) 9월 1일,
연산군의 폭정은 반정으로 이어졌고, 이미 광기어린 연산군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무혈로서 반정은 성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반정의 주역이었던 박원종은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옹립에 대한 의견을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마음을 돌려 보려 하였으나,
신수근은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일은 할 수 없며, 임금은 포악하나 세자가 총명하니 그를 믿겠다."고 반정을 반대한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기울어 반정군은 진성대군을 찾아 보위에 오르도록 하였고, 연산군은 옥새를 내어 주고 민가로 숨어버림으로써
반정은 무혈로성공하였다.
반정군은 정현왕후에게 반정을 알리고 진성대군을 추대한다는 내용을 알리고서야 비로서 교지를 내려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새 임금으로 추대한다고 선포하게 되었다.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는 날, 신씨 역시도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었겠지만,곧 바로 집안 사정을 알게되었다.
역적이 되는 폐주의 처남인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난후, 일가들이 반정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으며, 여인들은 노비로 끌려 갔고,
재산은 적몰이 되었다. 남편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접한 비운의 소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7일 후, 반정공신들은 중종의 아내인 신씨를 왕비로 책봉하는 문제를 논의하기에 이른다.
이는 훗날 자신들을 위한 방편으로 아비를 죽인 신하들로 신씨가 왕비가 되면 자신들에게 보복을 행사할 것이라는 불안감으로 왕비의 폐위에
대한 대세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목숨을 걸고 반정을한 반정세력들에게 20살의 중종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목숨걸고 반정을 꾀하여 중종을 앉히었으니
반정세력들도 중종 역시 자신들의 뜻에 거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치마바위의 전설
조강지처를 사랑했던 중종은 매일 부인의 사가(私家)쪽을 바라다보고 그리워하니 신씨 집에서는 부인이 입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임금에게 화답하였다는 바로 인왕산 치마바위의 전설이다. 과연 중종은 그녀를 사랑했고 못잊어 그리워했을까?
그러나 중종은 이후 여러 왕비와 후궁에 빠져 지냈으며 폐위 후 새로이 왕비가 된 장경왕후가 1515년 사망하자 그녀의 복위가 잠시 거론되기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1557년(명종 12년) 음력 12월 7일에 자식 없이 71세로 승하하였다.
심지어 복위를 거론한 신하들이 귀양을 가기도 했다고하니 중종은 그녀을 못잊거나 그리워하지는 않은듯하며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은 스물에 쫓겨나 50년 넘게 중종을 그리워한 단경왕후의 기구한 삶을 안타까워하여 그저 꾸며낸 이야기뿐인듯하다.
오히려 중종은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6일만에 죽자 흰 상복을 입고 애통해하였다고 하며 (왕은 국상을 당해도 흰 상복을 입지 않는다.) 대모산 아래 장경왕후릉(희릉)을 잘 조성하고 그 옆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하니 중종은 조강지처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왕비에게 빠져 산듯 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시호도 없이 폐비 신씨 혹은 신비(愼妃)라고 불리다가, 180년이나 지난 영조 때인 1739년(영조 15년) 에서야 김태남 등의 건의로 비로소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이라는 능호를 받고 왕후로 복위되었다.
다만 1544년 11월 15일 중종은 죽음이 임박하자 마지막으로 폐위된 왕비 신씨(단경왕후)를 찾았다고하며, 신씨를 만난 뒤 중종은 유시(酉時·오후 7~9시)에 환경전에서 승하했다니 죽을때가 되어서야 조강지처가 생각이 난 것은 아닐까?
단경왕후 비석
조선 왕조에서 비운의 왕비들
조선의 왕후 중,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왕비의 자리에서 폐출 된 비운의 왕비들이 있다.단종의 비 송씨가 그러하고, 연산군의 비 신씨가 그러했으며, 중종의 비 신씨가 그러했다.
또한 훗날의 광해군의 비 유씨도 그러한 비련을 겪게 도있다.
그러나, 단종, 연산군, 광해군은 모두 반정, 즉 구테타에 의한 폐출로 '서방 잘못만난 탓'일수도 있겠지만,
단경왕후 신씨는 반정에 성공한 임금의 부인이면서도 폐출이 된 비련의 왕비이다.
내가 들러본 사릉과 온릉!
조선왕조에서 장희빈등과는 달리 본의 아니게 희생된 비운의 왕비가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많이 있지만 특히 이번에 내가 둘러본
사릉의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는 혼인하고 3년만에 숙부이던 수양대군(세조)의 권력찬탈로 내명부의 만인지상인 중전마마에서 폐서인이되었고
그후 인고의 64년을 절규와 비통속에서 살았으며,즉 본인니나 왕의 직접적인 과오 없이 비운을 겪은 분이시며
온릉의 단경왕후 신씨는 중전 마마가 되는날이 역적의 딸이 되기도하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며,특히 중전마마가 되고 7일만에
폐서인이 되어 쫏겨난 비운의 여인이다. 그러나 단경왕후는 아버지신수근의 결단의 결과물이며,집안의 과오(?)이기에,사사로이는 연산군을
고모부로, 왕가로는 손위 서방님이었기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작난었으니 어디에 한탄을 할까!!
결론적으로 권력의 메카니즘과 세상과 사회의 보편타당한 진리, 순리, 삶,사랑, 행복등의 가치기준과 추구에 대한 많은 생각을 갖게한 탐방이었다.
온릉진입로
♥ 이 글을 보신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흔적도 좀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