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려 신숭겸 장군

몃져 2012. 12. 27. 11:15

2012년 12월 24일 소양강 상고대를 보고 인근에 있는 고려의 개국 충신 신숭겸 장군의 묘소를 찼았다.

금년들어 제일 추웠던 영하 14.5도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묘소를 찾은 것은 내 나름으로 뜻깊은 의미가 있었다.

구지 그 이유를 밝히자면

첫째, 오늘날 같이 험난한 세상에 이런 충신이 재현되었으면 하는 마음이고,

        사실 그렇다.믿을 사람 하나 없는 오늘의 세태를 볼때 더욱 그렇다. 자기가 필요 할 때는 간 쓸개 다 뻬어 줄 듯 하다가

        상황이 바뀌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 배신하고 못잡아 먹어 안달인 이놈의 세태를 보며 더욱 그리운 님! 그분이 그립고

        보고 싶었다.

둘째, 같이 동행한 사람 중에 내가 참말로 마음주고 아끼는 사람이 바로 그분의 후손이라,

        그 친구가 그분의 시조 묘소가 춘천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 내가 안내하고 참배하게 하기 위해서 였다.

어쨌건 신숭겸 장군은 내가 존경하는 인물이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 이었다.

 

 

신숭겸 장군

★ 원래 이름; 능산(能山)

★출생지 ; 전남 곡성

★성장지;춘천시

원래 전남 곡성에서 출생하였으나 춘전에서 자랐다.

신라 말기에 신라의 국력이 쇠약해 지고 지방 호족이 일어나 권력을 강화하던 시기에

뜻한바 있어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핵심 장수로 성장 하였다.

궁예가 철원지방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확장하면서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면서 포악한 군주로 변하자

서기 918년 뜻있는 장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고려를 세웠다.

 

★장군이 평산 신씨의 시조가 된 유래

어느날 왕건등과 함께 평주(平州)지역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날라가는 기러기 3마리를 보자

왕건이 누가 저 기러기를 쏘아 떨어뜨려 보겠는가 하고 하문하자

신숭겸 장군이 자청하여 3마리 중에 어느 기러기를 쏘아 보리까 하고 질문하자

고려태조 왕건이 3번째 기러기를 쏘아 보라고 하명했다.

이에 신 장군이 과연 3번째 기러기를 쏘아 떨어뜨리니 태조 왕건이 탐복하고

그 주변의 땅 300결을 하사하고 평산(平山)신씨 성을 하사 함으로써 이땅에 평산 신씨가 생기게 되었다.

 

 

927년 즉 고려 개국후 10년이 되던해에

후백제 권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포석정에서 휴희를 하고 놀던 경애왕을 사살하고 후백제의 괴뢰정부를 설치하자

신라로 부터 원군 요청을 받은 고려는 왕건이 친히 군사 5천을 이끌고 원정길에 오른다.

그러나 대구 팔공산 아래에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후백제군에 포위되어 왕건의 안위가 위태롭게 된다.

이때 신숭겸 장군이 청하기를 자기가 왕건의 복장으로 변장하여 후백제군의 권훤군과 싸울테니 왕건은 존체를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하라고 간청한다.

그리하여 왕건은 병사로 위장하여 겨우 직속의 소수 인원만의 호위를 받으며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여 목숨을 보존했다.

전투가 끝나자 왕건은 권훤에게  목이 잘린 신장군의 시신을 찾아 황금머리를 만들어 붙여서 장례를 치루었다.

신숭겸 장군이 묻힌 자리는 당시 고려 국사였던 도선국사가 왕건을 위해 잡아준 명당자리 였다 한다.

 

 

여기 봉분이 3개가 있는데 그 이유는 신장군의 시신에 목이 없어 태조 왕건이 황금으로 만든 머리를 붙여 장례를 지냈는데

도굴을 막기위해 어느 봉분에 황금 머리가 매장 되었는지를 모르게 하기 위해 3개의 봉분을 만들었다는 설과 부인의 봉분이란 설도 있으나

도굴꾼의 도굴을 막기 위해 처음 분터 봉분이 3개였다는 것이 정설이라 한다

어떤 왕릉 못지 않게 그 자리가 범상치 않다 

 

 

이곳은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로서 지도상에 고구려고분군 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의암땜에서 북한강을 따라 올가면 서면 면사무소 가기전에 좌회전 하여 들어간다

도로 표시판이 잘 되어 있어 찾아 가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장군의 초상이 모셔진 사당 잠겨져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대구 유적지에 세워진 신도비와 같은 신도비 

 

  

누군가 다녀가면서 올려 놓은 배 하나!!

 

 

 

 

신숭겸 장군의 우예들은 이조 초기와 이조 후기에 세를 떨쳤던 명문 대가로서

상신(장관급)8명, 대제학2명. 공신11명, 문과 급제186명등을 배출였다.

신숭겸 장군의 14세손에와서 20개 파로 번창했다.

우리나라 건국 초기에 이승만 대통령에 대적하여 대통령에 출마하여 유세도중에 급사하신 신익희 선생도 그 후예이시다.

현재  평산 신씨의 문중세가 51세손까지 번창했다니 우리나라 씨족의 족보상 당연히 오래된 명문대가임에 틀림없다.

 

신숭겸 장군의 유적지는 사실 대구 팔공산 아래의 유적지가 춘천의 묘소지역보다 훨씬 크고

잘 정비 되어 있으며 많은 관광객과 학생들의 탐방이 끊임없이 이루어 지고 있는데

여기는 신숭겸장군이 주군인 고려 태조 왕건을 구출하고 대신 전사한 자리로 그 뜻이 더 서려진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에 대구에 가면 직접가서 참배하고 담아와서 여기에 올려 놓으려 한다.

나는 고성이가의 28세 손으로 스스로 명문가의 후손이라 자찬했으나 평산신씨도 상당한 명문대가란 것을 알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