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4월12일
★공자묘
공자의 고향은 곡부이다 .곡부는 제남에서 남쪽으로 130여km떨어져 있고 전국시대에는 노국이라 했다
인구는 64만명 정도이나 관광명소로 오히려 관광객이 더 많을 때도 있다
곡부의 공묘,공부, 공림은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공묘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공부는 공자의 직게후손이 사는 집이며 공림은 공자 후손들의 공동묘지이다.
먼저 공묘에 들렸다
묘는 사당이란 뜻인데 원나라때에와서는 廟로 표기했다 사당이란 뜻이다
노나라의 내공은 공자의 사후 2년이 되던 해에 공자의 집을 묘로 삼았다.
그 후 기원전205년 전漢을 세운 고조 유방이 공묘에서 제물을 올리고 공자를 제사 지내는 제례를 실시하였다
그후의 황제나 고관들에게도 전례를 따르게 함으로 써 전통이 이어 졌다
청나라때 세워진 문이다
●공자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28일전국시대의 노나라 곡부에서 조금 떨어진 추읍에서 아버지 숙량홀과 어머니 안징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숙량홀은 딸아홉과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병약한 아들대신 새로운 아들을 원했느데
당시 버지나이 69세에 안씨집안의 19세에 불과한 무술인인 안징재와 혼례없이 정을 통하고 얻은 아들이 공자이다.
공자 나이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어머니 마저 세상을 더나 어려운 소년기를 보낸다.
17세때 부터 말단관리가 되어 일을 보면서 노나라 대학에서 시경,서경등을 배우면서 저자인 주공 단을 청년시절부터 사모하였고
평생동안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면서 공부를 해 나갔다.
36세때 부터 10여년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정치적 뜻을 펴려고 했으나 알아주는 제왕이 없어
향리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다가 향년72세인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난다.
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스승이 남긴 어록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논어로 공자의 가르침이 오랜세월에 걸쳐서 전해 내려와 동북아와 중원 사회의 정치 ,윤리 도덕의 규범이 되었다.
이 공자 사상을 집대성한 것은 공자의 증손자 자사의 제자인 맹자이다.
738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의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나라 전종은 시호 지성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이 되었다.
원나라에 와서 '대성지성문선왕이 되었고.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 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 되었다.
공자의 사상은 仁, 義, 禮, 智이다 이는 앞에서언급한 맹자의 인의예지와 와 일맥상통한다.
대중문은 송나라때의 대문이다
항단은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강론을 하던곳인데 여기에 정자를 지어 기념하고 있다
공자 시대에 심었다는 수령3000년에 가까운 편백나무다
여기 대성문이 마지막 누각으로 송나라때 지어 졌고 이 안에 공자의 상이 모셔져 있다
여기까지 들어 오는데 각 시대 또는 중국의 제왕들이 문을 하나씩 세웠는데
원래 있는 문 밖에 다가 새로운 문을 세웠으므로 저 앞에서 부터 문 문 문을 거혀 여기 까지 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공자의 사당의 면적이 그렇게 넓어진 것이다
진나라 시황이 공자 사상말살을 위해 고서등을 색출할때 공자의후손이 노벽이란 벽을 만들어 그 속에 책을 숨김으로서 화를 면했다는 노벽이다
공자家의 당시의 무물
●공자의 직게후손이 살았던 자택,공부
명나라 떼에는 공자를 聖人으로 높여서 부르게 되었다
●공림;공자의 직계손들의 공동묘지 지역을 말한다
공부를 나와 이제는 공자의 직계손들의 무덤이 있는 공묘로 간다
★안자 사당
공림에 들어가기 전에 그 입구에 있는 안자의 사당을 먼저 둘러 보았다
공자의 수제자 안자의 사당
여기서 부터가 공림의 진입로 이다
●공자 와 그 자손들의 묘지
공자의 무덤
여기서 모두 예를 다하여 절하였다
여기 왕자를 자세히 보면 마지막 획이 한참 아래에 가서 그으져 있다
이는바로 앞에서 보면 바로 앞의 낮은 담려락에 가리여서 아래 획이 보이지 않으므로 왕자로 보이지 않는다
황제가 볼때 공자를 왕이라고 하는 것을 숨기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란다
공자의 무덤에 가면 아들의 묘는 공자묘 앞에 있고 손자의 묘는 바로 앞에 있다
이는 손자를 안고 아들을 옆에 앉히고 가르치는 또는 담화하는 모습이란다
●주공묘
여기의 주공은 주나라 문왕의 동생으로 문왕이 죽자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성왕이 되는데
왕이 어려서 그의 삼촌인 이 주공이 조카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다가 조카가 장성하자 낙향한다
바로 그 주나라 성왕의 삼촌인 주공묘이다
여기도 예외 없이 중국 모택동의 문화 역명기에 봉건주의 모습의 철폐를 위하여
조상을 섬기는 유교를 말살하기 위하여 그 유적을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는데 바로 그 흔적 들이다
주공의 초상
찾는이고 별로 없다
●강태공
다음은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워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그보답으로 주나라 무왕으로 부터 제나라의 왕으로 봉해진 사람이다
시대적으로 보면 강태공은 공자보다 약 500여년 전의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이 역행군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남쪽부터 먼저 보았기에 그렇게 되었다.
강태공은 중국 고대 기원전 1100여년전 사람으로 즉 은나라 말기의 사람이다.
은나라가 폐망의 기운이 만연하자 강태공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것을 결심하고 대인을 만나 함께 창업을 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어느날 서기 지역의 제후가 지나간다는 정보를 알고 이 자가 새로운 나라를 도모할 대인 인지 시험하기로 하고
지나가는 길목에서 낙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리고 있는다.
물론 이때 낙싯대에는 낙시 바늘이 잆었다.
그리하여 희창이 지나가다가 유심히 보는데 낙시 바늘도 없이 낙시를 하는자가 있으니 이상히 여겨 말에서 내려 말을 건다
여기서 희장은 이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자기를 도와 함께 하자는 제의를 한다.
강태공은 직답을 피하고 함께 걷다가 여울에 도달하자 자기는 물이 겁나서 혼자 걷지 못하겠다고 하자 희창이 없어 건느겠다하고 태공을 업고 건는다.
여울을 지나서도 태공은 내리지 않고 다리가 아파 걸을 수가 없다고 하자 희창-이자는 이미 이지역의 제후로 은나라 황제가 옹으로 봉해 제후가 되어 있는 자 이니 대단한 사람이었다-은 말하기를 내가 젊으니 그대로 업고 가겠다고 하면서 게속 업고 걸었으나 800보를 걷고는 다리가 풀리고 힘이 빠져 도저히 더 업고 갈 수가 없자 안되겠다고 하고 태공을 내려 놓는다.
이때 태공은 희창에게 엎드려 큰 절을 하고 함께 제후님을 도와 동주 서주 800년을 지켜 주겠다고 하며 함께 의기 투합히기로 한다.
이리하여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는데 이자가 주나라 문왕으로 주나라의 초대 황제가 된다
이때 부터 중국 천하를 통일하여 주나라 시대가 되며 강태공에게는 산동성지역인 제나라 제후에 봉하였으며 강태공은 제나라 왕이 된다
후에 강태공은 神으로 추서되어 중국민의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
강태공의 후손들은 그후 지방 각지의 제후들이 되면서 각각 새로운 성을 짃게 되는데 그때 받았던 성씨의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물론 이 각 성씨의 시조비 인데 이것은 요즈음의 그 성씨 훅
손들이 세운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우리나라 노태우 대통령 노무현이도 이 강태공이 부여한 성씨를 받은 그 노씨이기에
여기를 방문하여 조상의 음덕을 받자와 등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강태공의 사당은 제나라의 도읍이었던 임치에 세워졌고 여기에 의총관을 만들었다
바로 이 비석들이 바로 그것이며
여기에 呂 丘 高 崔 連 盧 씨등의 시조비가 세워져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이들은 우리나라 진주강씨와 근본 뿌리는 같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강태공의 무덤을 찾지 못해서 강태공의 관만 묻고 이를 강태공의총관이라 지었다
●고차박물관
청도에서 제남에 이르는 고속도로변에 말이 끄는 중국 고대 마차 전차등의 고차 박물관이 있었다
고차박물관은 이 고속도로 건설 과정에 발견된 것을 그고속도로의 방향을 약간 바꾸고 그 자리에다 박물관을 만들어 세웠다.
진나라 시황의 용병무덤에서도 발굴되었지만 여기 박물관에는 순수 고대 중국의 마차의 발전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마차를 끌던 말과 마차가 그대로 순장되어 있으며 고대 마차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발전 하였는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흥미롭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러게 해서 3일차 관광을 모두 마치고 주나라 때의 제나라 수도 였던 임치에서 유방으로 이동하여 숙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