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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릉,사릉

몃져 2012. 7. 14. 22:03

 

홍. 유릉

 

서울에 있으면서 근대화의 격변하는 동북아의 혼란스러운 정세속에서

일본으로 부터 나라를 붙들고 바로 세우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조선의 마지막 두 황제의 발자취를 드덤어 보기 위해 홍.유릉을 찾았다.

그리고 단종2년1454년1월에 왕비가 된후 1년후에 단종이 노산군으로 책봉되어 영월로 유배된후

평생을 죄인으로 살다가향연82세에 세상을 떠나신분, 생각만 해도 가슴찢어질듯한  한많은 여인 정순황후의 능침을 보고 왔다.

 

또한 어린

 

 

홍릉

  • 26대 고종(高宗)
  • 능호 : 홍릉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지정번호 : 사적 제207호
  • 조성시기 : 1919년
  • 능의구성
  • 홍릉은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되었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하여 나란히 세워져 있다.
  •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하였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 되어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되어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되어 있다. 이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어정 등이 배치되어 있다.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진입부의 낮은 지역에 원형의 연못에 원형의 섬이 있고 식재 되어 있다.
  • 능의역사
  • 1895년(고종 32) 일본 정부의 사주로 낭인에 의해 경복궁 옥호루에서 시해당한 명성황후는 궁궐 밖에서 시신이 소각되었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복호되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당초 동구릉의 숭릉 오른쪽 언덕에 숙릉을 조성하다 국장이 중단된 후 그해 1897년 11월 청량리 천장산아래 새장지를 정하고 국장을 치르게 되니 홍릉이란 능호가 시작되었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춘추 67세로 고종이 승하하자 그해 3월 4일 현재의 위치에 조성하면서 천장론이 일던 명성황후의 릉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침전

침전내의 모습--아래사진

다른 왕릉의 정자각(제사드리는 장소)에 해당하지만 여기는 황릉이므로 침전을 세워 그 안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 배치도임 

 

 

 

 

 

 

 

 

 

 

 

 

 

 

 

 

 

 

황릉과 왕릉의 차이

  • 조선 왕릉의 변천사
  • 조선 왕릉 석물의 배치와 구조는 기본적으로 큰 변화 없이 오랜 기간 반복되었지만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나 당대 왕의 의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가 있어 왔다. 제1기는 태조의 건원릉(1408)에서부터 문종 현릉(1452)으로 조선 왕릉의 기본형식을 갖춘 시기이다. 제2기는 세조의 광릉(1468)에서부터 숙종 익릉(1681)까지로 석물의 전반적인 배치나 표현상에서 조선 왕릉 특유의 조각 양식이 확립된 시기이다. 제3기는 인조의 장릉(1731)에서부터 철종의 예릉(1864)까지이며 병풍석이나 장명등의 형태에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고 조각의 비례가 바뀐다. 제4기는 황제릉이 조성된 시기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 칭하면서 고종의 홍릉과 순종의 유릉이 황제릉의 형식을 취하였다. 이에 더하여 유릉의 석물에서는 일제의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 왕릉과 황제릉의 차이
    홍릉과 유릉은 조선의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황제라 칭한 고종과 순종의 능이다. 황제릉으로 조선 왕릉과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는 신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도가 설치되어 참도가 3개의 단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둘째는 조선 왕릉의 정자각에서 월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정자각의 좌우에 설치되어 있는 것과 달리 정자각을 대신하는 침전(寢殿)의 정면에 설치되어 있어 홍살문과 직선축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셋째는 능상구역의 봉분 앞에 위치하던 석물이 참도에서 침전 사이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중국 황제릉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넷째는 말기에 보인 비각의 위치인데, 홍릉 역시 비각이 정자각과 수평을 이루고 있다.

 

  • 정자각이 침전으로

             홍릉과 유릉에서는 정자각이 ‘정(丁)’자의 평면 형태에서 ‘일(一)’자형으로 변화되었고,

             그 이름 또한 ‘침전’으로 변경되었다.침전이라는 용어는 궁궐건축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임금의 숙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능원의 기본 석물인 문무석인과 동물상이 침전 앞 신도로 내려오면서 석호와 석양이 사라졌고

             대신에 중국 명나라 황제릉에 보이는 다양한 동물상이 등장한다.

            우선 문석인과 무석인이 차례로 마주보고 서고, 그 뒤로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순서대로 신도의 양쪽으로 정렬하고 있다.

            이러한 상설이 유릉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단 유릉의 경우는 서양식 조각수법이 더욱 많이 반영되었다.

 

 

 

 

 

 

 

 

 

 

 

 

 

 

유릉

 

 

 

 

 

유릉과 홍릉의 차이는 석물의 조각상태만 다르고  홍.유릉을 보기위해 경내로 들어가면 좌측이 홍릉이고 유측이 유릉이다.

유릉의 오른편아래에 있는 넓고 긴 한옥은 관리 사무실이다.

 

 

 

 

관리 사무실 

 

 

 

홍릉 입구에 있는 연못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실 이야기

     대한제국의 탄생 

 

         1863년(철종 14) 12월 조선 25대 왕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가 바로 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  위한 고종은 대비의 수렴청정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1873년(고종 10)에는 마침내 친정을 선포하지만, 아버지와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외척인 민씨 일가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종의 입지는 굳건하지 못하였다.

  • 이러한 와중에 나라는 안팎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나라의 곤궁과 개방의 압력 속에 지배층은 개화파와 수구파로 나뉘었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 등이 잇따라 일어났다. 조선의 왕실은 이에 속수무책이었으며, 사건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일본, 러시아, 청나라 등의 열강의 힘을 빌어야 했다. 고종은 쇄신의 의미에서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광무라고 하였다.
  • 현대사를 함께한 마지막 황실의 일원들
  •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후 순종은 황제위에서 이왕(李王)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가 1926년 승하하였다. 홀로 남겨진 순종의 부인 순정효황후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제 강점기과 1945년의 광복, 다시 5년 후의 6.25 전쟁 등 한국 현대사의 슬픈 나날을 지켜보다가 1966년 7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자 순종의 이복동생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 강점기 당시의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하여 11세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하였고,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친왕과 마사코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생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고 둘째 아들 이구는 멸망한 황실의 마지막 황세손으로서 극적인 삶을 살다가 2005년 74세의 나이로 운명하였다. 창덕궁 낙선재에 빈청을 마련하였으며, 영친왕이 잠들어있는 영원에 안장되었다.
  • 찾아가는 길

                 주소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

  • - 전화 : (031) 591-7043
  • - 팩스 : (031) 591-5628
  • 교통편
  • 전철
  • - 경춘선 금곡역(도보 15분거리)
  • 버스
  • - 청량리: 일반버스(30, 65, 165-3), 좌석버스(330-1, 1330-2, 1330-3, 1330-5, 3300),
                  직행버스(765, 765-1, 1330, 1330-1, 1330-4, 1330-44)
  • - 강변역: 일반버스(9-3)
  • - 잠실역: 좌석버스(1000, 1115, 1200)
  • - 당고개: 일반버스(10-5)
  • - 길동: 일반버스(23)
  • - 강남역: 좌석버스(1100)
  • - 동대문: 광역급행(M2104)
  • 승용차
  • - 서울외곽순환도로 → 남양주IC → 46번국도 춘천방향 → 홍유릉
  • - 강변북로 → 구리 → 46번국도 춘천방향 → 홍유릉

 사릉

 

 

           능 이야기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의릉

  • 능호 : 사릉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 지정번호 : 사적 제209호
  • 조성시기 : 1521년(중종 16)
  • 능의구성
  • 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며 단릉 형식이다. 처음에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민간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다. 그 후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숙종 때(1698년)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면서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병풍석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문석인과 석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양석과 호석도 한 쌍 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가 짧기 때문에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 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신도 및 어도가 동계와 연결되지 않고 끊어져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능의역사
  •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82세에 소생 없이 승하하였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정순왕후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가족 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 1698년(숙종 24) 11월 6일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그 후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영내에 설치된 양묘사업소에는 연꽃을 비롯하여 각종아름운 꽂들이 많았다

 

 

 

 

 

♥ 이 글을 보신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흔적도 좀 남겨 주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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