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차;3월30일 , 바로셀로나
아침에 기상하니 날씨가 좋아 상쾌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바로셀로나는 스페인 17개주 중하나인 까딸루니아 주에 속하는 도시이고 중세 스페인의 4대왕국중 아라곤 왕국이 있었던 곳이다.
아라곤 왕국은 1492년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의 아랍인을 다 내쫓으므로서 스페인 전체가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는데
그 이전까지 존재했던 강대왕국으로 15세기가지 지중해와 이태리 ,발칸반도 일부까지 지배했던 강대국중의 하나인 왕국이었다
1492년 스페인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에스파아냐로 불리었으며, 콜럼버스가 통일의 왕 이사벨 여왕의 지원하에 스페인 세비아에서 출항하여 미 신대륙을 발견햐면서 재정적 부와 식민지 등으로 이때부터 300여년간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 이었다.
그 중심에 아라곤이 있었다.
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귀국하는데 귀국한 항구가 여기 바로셀로나 항이다 그래서 항에가면 65미터의 콜럼버스 기념탑이 있다.
사실 아라곤 이란 못된용을 말하며 신화에 이 용이 못된 짓을하자 양을 갖다 바쳐 성질을 따둑거렸는데
용이 원하기를 양이 아닌 여자 아이를 바치라고 강요하자
성 죠지 성인이 용에게 잡혀간 공주를 구하는데 성 죠지 성인의 왼손에는 방패 오른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특히 맑은 공기속에서 떠르는 아침햇살과 여명의 붉은 노을이 환상적이었다
식사도 상당히 좋고 해서 어제 마드리드에서의 악몽같던 점심을 잊어 버리게 되었다.
식사를 하고 바로 그 유명한 근대의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 가족성당으로 갔다
★성 가족성당
한창 공사 중인 성 가족 성당의 모습
이 성 가족성당은 가우디 성당이라고도 한다
이 가우디 성당은 가우디(1885년~1926년)가 1880년에 설계를 완성하고 1887년 부터 공사를 시작했다마는.
스페인 내전(1936년~1939년)등 국가적 혼돈과 재정궁핍으로 돈이 없으면 건축을 중지하고 돈이 생기면 공사를 진행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198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으로써 자금지원을 받게되어 2026년에 완공을 목표로 지금 활발히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사원의 외관은 옥수수모양의 탑들이 세워져 있는데 12개의 옥수수는 12제자를 의미하고 4마리의 독수리는 4대성인을 상징하는 것이란다
동측은 탄생의 면(벽)으로 녹색과 파랑색의 차으로 꾸몄고 서쪽면은 수난의 면으로 빨강과 주황의 창으로
꾸몄다. 남쪽은 영광의 면으로 12톤의 청동으로 벽면을 별도로 세워 여기에 주 기도문을 조각해 놓았다
기도문에는 라틴어 영어 등이 있는데 한국어 기도문도 있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그중 가장 큰 글씨는 이지방 까탈루니아주의 글이란다.
사진이 넘 많이 소요되어 여기 올리지는 않았지만
외부의 동측면에는 중앙의 생명의 나무아래 청년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모습과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의 탄생 알림과
마굿간에서 에수의 탄생을 경배하는 동방박사3명의 경배 모습
천사들이 청동나팔을 불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조각,아기예수의 영아 세례,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샙의 혼인 신고 ,당나귀를 타고 이집트로 탈출하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고 가장중요한 것인 아버지 요샙과 어머니 마리아 와 아들 예수의 성서러운 가족이 조각되어 있는등
리얼한 조각들로 구성되고 있고
서쪽면에는 유다가 미인계에 현혹되어 예수를 고자질하여 예수사 로마 병정에 잡혀 끌려가는 모습과
예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모습이 돌로 조각이 되어 있고.
위 사진의 유다상뒤의 벽면에 조각되 사각형 아라비아 숫자를 잘 보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
위 사진과 같이 아직 공사중으로 그물망이 쳐저 있지만 예수께서 황금옷을 입고 승천하는 모습등이 조각되고 있었다
내부기둥의 컨샙은 바로셀로나의 가로수인 푸라타나스 나무를 조형화 한 것이며 기둥을 통상둥글게 하는데
여기서는 각지게 해 놓았는데 이느빛의 난반사를 일으켜서 내무 밝기를 균일하게 함이엇다는 것이 매우 특징적이었다.
그리고 전기등 인공조명이 아니라 천정의 창과 벽면의 창으로 들어 오는 빛 만으로 조명을 하도록 설계한 것 또한 색다른 것이었다
이 사진이 동측벽면의 색으로 녹색은 자연 .파란색은 탄생을 의미한다기에 이 색을 포인트로 담아 보았다
이사진은 서쪽 벽면으로 빨강색과 주황색 빛이 들어오게 했는데 이는 예수으 피ㅐ와 고난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게 남쪽 출입구에 문처럼 버티고 선 벽인데 이면이 영광의 면으로 각국의 언어로 주기도문을 새겨놓았다
이를 조금 홛대해 보면 중앙 우측에 한국어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로 조각되어있다.
창문의 모자이크와 색상이 너무 아름답고 조형미가 넘친다
천정의 조각모습
이것은 설계도로 만든 조형도 이다
좋고 의미있는 건축물을 구경하였고 11년 후에 완공행사에 꼭 와 보고 싶었다.
★구엘공원
구엘 공원은 19세기 스페인의 재력가 구엘이란사람의 요청으로
가우디가 설계한 60채의 전원주택 단지로 1900년에서1914년간에 공사를 한 곳이다
그러나 그 위치가 도시 뒷편의 높은지대라 마차시대의 교통 급수문제로 분양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9414년 1차 세게대전이 발발함으로써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 폐허가 된것을 1918년 바로셀로나 시에서 구입하여 관리 하다가 198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공원이다
이 공원의 특징은가우디의 기발하고 특이한 건축의 진 면목을 볼 수 있어 지금은 세계적 관광명소가 되어 있었다
말로써 설명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바로셀로나에 갈 기회가 있으면 꼭 한번 가 보라고 권유하고픈 곳이다
★바로셀로나 해변
점심으로 스페인 전통식인 해물 빠에야을 먹고 바로셀로나 해변을 산책했다
★몬주익 언덕으로
바로셀로나 몬주익 하면 19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션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한 곳이란 것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몬주익의 몬은 스페인어로 산을 말하며 주익이란 유대인이란 뜻으러 유대인의 산이란 의미이다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이 천주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종교인이 아닌 자는 성 밖으로 내 쩣을때 유대인이 집난촌을 만든곳이다
특히 가우디가 가우디성당(성 가족성당)을 설계할때 인간의 창조물이 신의 창조물 보다 높을 수 없다는 이유로 192.5m인 몬주익 언덕보다 가우디 성다을 20m 낮게 설계하였다고 한다.
몬주익 언덕에 가면 경기도와 자매결연을 맺은 기념으로 황영조의 마라톤 우승을 상징하는 고원이 만들어져 있다
한국민의 긍지를 느끼면서 찰칵 기념촬영
몬주익 언덕의 종합경기장은 1936년 세워진 운동장으로 올림픽때는 약간의 보수와 스텐드의 증축정도로 올림픽을 치루었단다
메인스타디움 앞에 나오면 아래로 스페인 광장을 내려다 보는 전망좋은 곳이다
많은 관광객과 나들이 나온 시민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했다.
거리의 확가들이 그린그림이 현대 모드니즘의 화풍이 아름다워 사진으로 담아 보았다
★람블라스 거리
몬주익에서 내려와서 시내에서 차한잔을 하고 바로셀로나의 명물거리인 람블라스거리를 걸었다
람블라스 거리의 특징은 *잡동사니 거리, * 꽃집들,*재래시장,* 노천카패,*거리의 화가들,*콜럼버스 기념비등이 있다.
우리가 차 한잔을 한 가패가 있는 건물-이 건물도 가우디가 설계한 건물이며 사연이 많은 건물이나 여기에 다 늘어 놓지는 안겠다
중앙광장 코너에백화점이 있는데 구조물이 특이해서 담아 보았다
★바로셀로나 야간관광
사실 마드리드에서 야간관광이 옵션으로 되어 있었는데 바로셀로나로변경되어 실행되었다
낮에 가 보지못한 구 시가지와 골목길들을 둘보고 바닷가에서 맺주한잔 하는 시간이었다
한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만 스페인에서는 구태여 한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것 같다.
맛도 없고 특징도 없고 영 그렇댜.
이 성당은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가 살았던 곳이며 현재는 아라곤 왕국의 문서 보관소이다
여기 게단에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콜럼버스를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그 당시 콜럼버스는 대 영웅임에 틀림 없었다.
여기는 바로셀로나 대 성당이다
이성당은 1350년 부터 시작하여 150년간 공사를 하여 준공한 건축물로서
뾰쪽뾰쪽한 첨탑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생각의 산물이란다
이 성당은 카우디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에배를 드린 성당으로도 유명하고
가우디는 돈이 생기면 성당건축과 불우한 이웃돕기에 썼다고 한다
가우디는 1926년 6월7일 여기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길을 건너다 전차에 부딛쳤는데 거리의 노숙자인줄 앟고
대수롭지 않게 처리하고 병원으로 옮겼는데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 사고로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3일만에 사망하였는데 유산은 전부 성당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가우디는 성가족성다을 위해 43년간을 봉사하다가 결국 미완서의 상태에서 세상을 떴다.
과
성당 내부모습
이
여기 성당 벽에 파인 자국이 있는데 이는 스페인 내전시에 일어난 총탄 자국이다
그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수리 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 하면서 전등 불만 밝혀 놓고 있다
바로셀로나 시청 건물
국기, 주기, 시청기
시청 맞은 편에 까탈로니아 주청사가있 다(깃발 두개달린 건물)
왜 이렇게 불안한 자세로 서 있을까?
저 조그마한 컵에 온정의 손길이 닫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개는 이미 채념한 듯 하다
야외 까페들의 모습
어것은 땅에 박힌 조각품인데 매우 의미 있는 것이다.
식당이나 열쇄, 옷, 신발등 의 가게중에서 100년이상 가게를 운영한가게중에
품질, 가격, 공정성 등을 엄격히 심사하여 인정이 될때 이 상패를 수여 하는데
가게 주인은 이것을 가게 앞에 설치 해 엏고 있다
이것이 바로셀로나 해안가 로타리에 설치된 콜롬버스 신대륙 발견 기념비 이다.
높이는 60m이다 동서남북 어디서나 잘 보일 듯 하다
여기 해안으로 요트는 물론이고 대형 쿠루즈 선박도 접안하는 항구이다
항구에 지는 저녁노을이 너무나 아름다워 다들 맥주마시며 즐기는데
나는 좀더 아름다운 모습을 담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고 해서 땀으로 목욕을 한 추억의 장면들이다
●9일차 ;3월31일 ,피카소 미술관관람
마지막 밤을 잘 잤다.
어제 는 방이 불편한 점이 있었는데 좋은 방으로 바꾸어 주어서 편히 잘 잤다
아침 햇살을 받는 동네의 모습도 아름답다
이제 짐을 챙겨서 나가면 피카소 미술관만 보고 공항으로 가서 독일의 프랑크 푸루트에서 연결편으로 귀국한다
방에서 내다본 아침햇살, 너무 깨끗하고 원색적인것이 너무 아름답다
방에서 내다본 아침 햇살.너무나 아름답다
피카소 미술관 앞에서 개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여행의 또 다른 큰 성과는 내가 잘 몰랐던 피카소에 대해서 제법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변에 알게된 피카소에 대해서 여기에 정리해 둔다
●피카소
피카소는 스페인 남서 해안에 있는 말라가의 작은 마을에서 미술선생인 아버지의 지도하게 크게 성장 하였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아들이 미술을 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했으나
그 천재성과 집념을 보고 아들의 미술공부를 적극적으로 지도하였다.
피카소가 열살이 될때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가 자기보다 더 천재적 화가가 될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미술도구를 아들에게 전부 넘겨주고 아들의 지도에 전념하게된다.
피카소는 10~14세때는 인물화중심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그렸으며
그때의 인물화를 보고 너무 사실적이고 섬세한 ,사진 같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14세~16세에는 풍경화 중심으로그렸다.
특히 15살에 그린 동생을 모델로 한 세례식 그림은 매우 사실적인 그림으로 너무 아름답고 예술적 이었다.
아버지가 미술가 였기에 유년기에 스페인 국전이나 마드리드 대전 등에서 심사위원이 좋아 할 그림을 그리게 하는등으로 큰 상들을 많이 탔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파인 아트 스쿨이라는 신동들만 들어가는 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를 하고 프랑스로 넘어간다
19세에 개인전을 연다
뒷골목 아지트 같은 곳에서 전시회를 하면서 침울하고 어두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는 신동이라던 자기가 프랑스에서는 우물안 개구리 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부터이고
이때부터 청색과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리는피카소의 청색시대가 열린다.
프랑스의 개방적인 문호에 새로운 시각을 갖게되고 돈이 없어 술집과 카바레등 우울한 생활을 하다가 돈이 생기면 술집 서크스등을 좋아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처럼 프랑스에서 어려운 시절에 여자에 대한 편력이 심하여 돈이 생기면 수색에 빠지는등 괴팍한 생활은 그를 변하게 만들고 만다.
빈민촌에서 생활하면서 모델을 구할 수 없어 빈민촌의 풍경,거리의 죽어가는 사람을 모델로 돈 안드리고 그림을 그리면서 핑크와 붉은색을 주로사용하기 시작한다(1901~1905년)
40대에 들어와서 큐빅이즘(입체적인것)이라는 지금까지 미술계에 없던 새로운 장르을 창출하면서 미술계의 재벌로 등장한다.
70세에 들어와서는 도자기 장르로 또 한번 성공을 거둔다.
피카소는 91셰까지 생존하면서
★미술계의 바람둥이로 여자친구가 바뀔때 마다 화충이 달라지는 인생여정의 단면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다.
만년에 가서는 비둘기를 중심으로 한 장르의 작품을 내 놓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가 비둘기를 즐겨 그렸는데 아버지에 대한 동경으로
자기 인생을 재 조명하는 인생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그런면을 보여주었다.
암튼 스페인 마지막 선물이 값져서 여행도 매우 만족한 것이 되었다
공항으로 가서 지루하고 힘던 시간을 넘기고 무사히 귀국하여 여행의 결과를 정리하는 이것도 행복이라
단지 우리가 귀국하기 며친전에 바로셀로나를 출발하여 뭔핸으로 가던 LH항공기가 알프스 산맥에 충돌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로 모든 유럽의 방송들이 연일 톱 뉴스로 보도 되고있었고
더구나 우리가 타고 복귀할 비행기도 L.H항공사이니 은근히 걱정이 되던 것이 아련히 남는 여행이었다
▩8박10일간의 포르투칼, 스페인 여행을 마무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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