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고구려,백제의 고대3국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임진강은 매우 의미있는관계에 있었다.
고구려쪽에서는경기 평야의 옥토를 차지하기위한 남진 정책이나
신라,백제쪽에서는 대동강변의 옥토,그리고 선대 고조선의 옛강역을 되찾기위한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의 그 제1관문이 여기 임진강 이었다.
평양으로, 한성으로 진출하기 위한 최단거리인 개성 고랑포 파주를 잇는 축선상의 요충지로서
고랑포 이서 지역은 당시의 수단으로 강을 건늘 수 없었으며,
오직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나루와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마포나루(현 마포대교가 있는 근처)이다.
그 이동지역은 산악지역으로 한강 유역으로 진출이 어려운 지역이다.
따라서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전곡의 한탄강과 임진강 변에서 서쪽으로 고랑포까지의 지역이
3국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구려 광개토대왕때 임진강까지 진출하여 당포성과 호로고루성을 축조하여 백제의 북진을 저지 했으며,
백제는 적성면에 있는 육계토성과 칠중성으로 대치했다.
신라 또한 진흥왕때에는 전곡동쪽 까지 진출하여 매초성을 축조하고 북진의 교두보를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고구려, 신라 백제의 고대 3국이 그 흥망에 따라 각축장이 되었던 곳을 탐방해 보면서 오늘을 반추해 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리라.
특히 이땅에서 벌어진 1950년 6.25 전쟁때는 고랑포 나루 북방2km지역이 북위 38도선으로서 남과 북이 대치하던 곳이었으며
적의 주력부대가 여기 고랑포 나루를 이용하여 남하하였다.
그 당시도 서해에서 중부 전곡에 이르는 임진강중에서 걸어서 도보로 건널 수 있는 곳은 위 사진에서 표시한 것과 같이
고랑포 나루와 마포나루 뿐이었기에 북괴군의 주력부대는 서울과 최단 직선거리인 고랑포나루를 건너 서울로 직행하려 했다.
그때 이 고랑포 지역을 방어하던 한국군1사단(사단장 백선엽장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으며 적의 진출을 저지 하였으나 결국 방어선은 무너지고
전쟁발발 3일만에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한 우리나라의 전쟁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은 바로된 국민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고대와 현대,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이지역의 역사 유적지를 둘러 보았다.
당포성과 숭의전
당포성
당포성이란 남한산성과 같은 그런성이 아니고 적국의 도강이나 이동을 감시하는 전방초소 형태의 성이다.
아차산에 가면 한강가에서 부터 용마산 쪽으로 만들어져 있는 보루와 같은 대규모 초소인 듯하다.
주변지역과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감시하기 좋은 위치에 성토를 하여 만들었다
최근에 만들어 세운 방벽과 같은 울타리,그 당시에도 초소를 방어하는 이와 비슷한 방책선이 있었을 것이다.
사진의 윗쪽이 상류이다.위쪽의 자갈같이 보이는 곳이 도보로 건널수 있는 여울목이다.
이 지역의 임진강이 물돌이를 하며 흘러가므로 사진상의 강 왼쪽(현재,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이 고구려영토이고
강의 오른쪽(현재,파주시 적성면 삼화리)이 백제의 영토였다.
당포성 위에서 바라본 동이리 지역의 비옥한 농토
당포성의 복원작업 모습
당포성은 고구려의 뛰어난 성곽축성법을 관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인공적으로 축조한 동벽에서 보이는 수직의 기둥홈과 확의 세트구조,
동벽 정상부에 일정한 간격을 갖춘 기둥구멍은 중국 집안지역에서 관찰되는 고구려성곽의 특징적인 구조로
남한지역에서는 현재까지 당포성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중요한 문화재 이다.
찾아 가는 길
자유로 이용시
서울(자유로)--문산IC(37번국도)--적성--어유지리삼거리(좌회전)--마포교건너우회전--바로옆 당포성입구 간판이 있슴
숭의전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곳이다.
숭의전 입구의 홍살문
운치있는 진입로
숭의전 정경
출입대문
숭의전-고려 태조를 비롯한 4대왕의 위패를 모신곳
숭의전 내부모습-태조왕건만 초상화가 있고 다른왕은 위패만 모셔져 있다
숭의전 오른쪽 건물 -배신청
배신청 내부- 공신 16위를 모신 위패
고려조의 충신16명--복지겸,홍유,신숭겸,유금필,배현경,서희,강감찬,윤관,김부식,김취려,조충,김방경,안우,이방실,김득배,정몽주
난 여기에 최영장군이 없는 것이 못마땅하다.
물론 이성계가 쿠테타를 일으킬때 최영장군이 끝까지 저항했지만
그것은 국가의 안보를 지키는 군인으로서 당연히 맞서야 하는 것 아니겠나!
아울러 숭의전 자체를 이조시대에 와서 지었고 여기에 전조의 왕들과 16공신을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고려유민을 회유하고 어루만지기 위함일 것이며 또,조상을 숭배하는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하였기에 이루어 진 것이라면
승자의 입장에서 패자를 위무하고 감싸안을 수 있는 포용력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보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볼때 오늘날의 우리 현실과 견주어 볼때 생각케 하는바 있어 가슴이 아프다.
전사청과 앙암재
앙암재쪽에서 본 숭의전과 배신청
제례때 사용하는 향, 축,폐 등을 보관하고 제관들이 제례 준비를 하며 머무는 곳
평양에 있는 태조 왕건의 릉의 모습--이는 김일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의 릉이 아니라함
왕건이 중국의 사신에게 써 주었다는 친필 휘호라는데 진위여부는 모르겠다. 진짜 진본이라면 너무 귀한 국보가 아니겠나
위의 친필 휘호의 글을 정자로 다시쓴 글
평양의 박물관에 있는 왕건의 청동좌상 보습
숭의전의 재건
숭의전은 조선시대 1605년 선조 38년과 1727년 1868년 영조3년,1789년 정조13년,1868년고종5년1908년순종2년등 크게 총5차례에 걸쳐 개 수와 중수를 반복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건물이 전소되었다.
그후 1971년 숭의전의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그 터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 부터 재건하여 오늘날의 건물이 있게 되었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3칸,측면3칸 규모의 숭의전을 비롯하여 배신청,이안청, 전사청,앙암재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외신문,협문3동,
운조문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부속건물들은 모두 돌담장으로 둘러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게 되어 있으며 앙암재와 전사청은 각각 별도로 독립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원래의 숭의전은 18칸 규모의 정전과 배신청,이안청, 향배청,전사청 주방등의 건물과 2개의 문이 있었다고 한다.
숭의전 입구의 모습들
-왕자회관-
이집에서 칼 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같이 먹은 6명 모두가 지금까지 먹어본 칼 국수 중에서 가장 맛있는 칼 국수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햇으며 ,심지어 서울에 분점을 한번 내어 보자고 요리사이며 주인인 아주머니에게 제의 하기도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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